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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비즈 칼럼

해외곡물조달 시스템이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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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이준원
농림축산식품부 차관보

유사시 국민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군대와 식량이다. 우리나라는 국방안보를 위해 60만 대군을 상시 운영하고, 관련 예산도 한 해 30조원이 넘는다. 하지만 안보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식량안보 상황은 어떤가? 연간 우리나라 양곡 소비량 2000만t 중 1500만t을 수입하는 실정이다. 오랫동안 낮은 곡물 가격과 수입 농산물에 익숙하다 보니 식량안보에 대한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 식량난의 교훈을 잊은 것 같아 안타깝다.

 6·25전쟁 중 쌀값은 화폐개혁 전 원화 기준으로 1949년 ㎏당 120원에서 52년 5825원으로 50배 폭등했다. 현재 쌀 한 가마니 값 17만원이 850만원이 된 셈이다.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특히 우리와 같이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는 유사시 해외에서의 안정적인 식량조달이 쉽지 않아 문제가 심각하다. 세계 곡물시장은 현재 소수의 곡물메이저가 곡물교역을 독점하고 있다. 유사시에는 비싼 값에도 필요한 만큼 살 수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많은 선진국은 식량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의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50년이나 앞서 준비해 왔다. 일본의 농협은 안정적인 곡물 확보를 위해 60년대 중반 미국 남부에 진출했고 79년에는 곡물 수입에 필수적인 수출 엘리베이터를 미국에 건설했다. 현재도 미국에서 4개의 일본 종합상사가 곡물사업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곡물 도입량 3000만t 중 2000만t 정도를 곡물메이저를 통하지 않고 직접 도입하고 있다.

 우리의 해외 곡물조달 시스템은 시작단계다. 우루과이라운드(UR),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밀린 국내 농업을 지키기에 바빴다. 식량확보를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국제곡물가격이 급등한 2008년에야 곡물조달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11년부터 정책으로 추진 중이다. 그러나 아직 안정적인 해외 곡물조달에 필요한 곡물 엘리베이터는 확보하지 못했고, 곡물수입의 대부분을 곡물메이저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수입업체들이 해외 곡물메이저로부터 곡물을 도입해 비싸면 비싼 대로 싸면 싼 대로 마진을 붙여 국내에 판매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식량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국내 인식 기반도 미약하다.

 정부는 안정적인 식량수급체계 구축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설정하고, 국내 생산만을 반영하는 자급률 대신 해외조달을 포함하는 자주율 개념을 도입했다. 현재 20%대인 자주율을 2017년까지 50%대까지 높이려는 것이다. 해외농업개발 투자 확대와 함께 아시아 주요국과 공동의 식량안보를 위해 비상 쌀 비축(APTERR)제도를 도입하고, 해외 곡물조달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러한 해외곡물조달 시스템 구축이 성공하려면 일본처럼 농협이나 민간의 참여가 절실하고 이러한 시스템 구축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국민적 지지와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 준 원 농림축산식품부 차관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