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8)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0)|돌출부의 혈전(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낙동강은 창녕군 익산 서쪽으로 돌출하여 낙동강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은 거창·합천·창녕 지구로부터 영산을 거쳐 밀양과 삼랑진으로 이르는 요충 지대이다.
낙동강 교두보를 제일 먼저 크게 위협한 곳이 바로 이 돌출부에서였다. 8월4일 괴뢰군소장 이건무는 합천의 사단본부에서 작전지도를 놓고 낙동강동안의 지형을 세밀히 살폈다. 8월 이전에 이는 괴뢰의 소위 영웅 칭호와 함께 제 1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그가 지휘하는 괴뢰군 제4사단은 제3사단과 함께 남침의 선봉에 서서 서울을 점령하고 이어 대전에서 윌리엄·F·딘 소장의 미임 사단에 큰 타격을 준 부대였다.
길일성은 4사단에 서울 사단이란 명예칭호까지 주었다. 이건무는 도하자재와 탄약을 충분히 축적하고 화력을 준비한 후 도하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전반적인 전세가 아를 허용치 않았다.

<피아 사단이 두 번째 격돌>
전 총사령부로부터 왜관 북쪽의 15사단도하와 6사단의 마산공격과 호응해서, 4사단도 8월5일이나 6일에 도하하라는 작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8월6일 상오 영시 낙동강상공에 붉은 색과 노란색의 조명탄이 올라가고 괴뢰군 4사단16연대는 돌출부에서 도하를 개시했다. 이를 계기로 돌출부에서 40여일에 걸친 피아 간의 혈전의 막이 열리게됐다.
적8월 공세 때 돌출부에서 부닥친 피아 사단은 대전전투에 이어 두 번째의 대면이었다. 낙동강 공방전 때의 이런 경우는 국군 제1사단이 문산 전투이래 다부동에서 역시 적1사단과 두 번째로 격돌한 예를 들 수 있겠다.
국군1사단이나 미제24사단이 제1차 대전에서 되로 받은 고배를 낙동강에서는 말로 갚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사실이었다.
딘 소장 실종 후 미24사단장에 취임한 존·H·처치 준장은 돌출부의 지형을 훑어본 후 도로망의 관계로 이 방면에 대한 적의 주공은 창녕 정면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쪽에는 도하점도 많고 지형도 보병 공격에 적합한 곳이지만 도로가 적기 때문에 방어하는 측은 기갑부대에 의한 반격이나 증원이 어렵다.
따라서 북괴군은 이 약점을 노려 이 방면을 주공으로 택하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공격시기에 대해서도 적온 아군의 방어진지가 미흡할 때 빨리 공격하고 싶겠지만 도하자재가 부족하므로 8월10일 전후일께라고 판단했다. 처치 준장의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오판이었다.
이 무렵의 미24사단병력은 그 동안 전투에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어 보병연대는 1천명 미만의 2개 대대 편성이고 사단 포병부대의 포는 32문에 불과했다.
전력은 통상사단의 반경도로 추산되었다. 그래서 사단은 기동방어의 방식을 취하여 적이 주공지점으로 판단되는 창녕 정면에 제21연대를, 현풍 정면에 한국군 제17대를(주=8월8일 타전 선으로 이동), 영산 정면에 제34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기동예비의 제19연대와 정찰 중대를 창녕에 두었다.

<미군들, 적 도하 확인 못해>
이렇게 배치를 마친 미24사단은 8월2일부터 개인 호를 파는 등 방어진지를 서둘러 구축했지만 자재가 달려 철조망과 지뢰는 창년 정면 일부에만 가설했다. 24사단이 이 방면에 진지를. 구축할 때 한국 주민에 대해 강제조치를 취했다.
즉 강변부터 8㎞ 이내의 전 주민을 강제 철거시킨 것이다. 미군은 전단과 강력한 확성기로 명령 지역 안에서 철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 사살한다고 포고하고, 창녕과 영산 부근에 모인 30만 주민을 부산지역으로 .수송했다. 또한 낙동 서안으로부터 동쪽 교두 보안으로 넘어오려는 피란 민도 약10만쯤 됐는데 미군은 적 게릴라의 혼합 침투를 염려하여 피란민 종렬 바로 앞을 포격으로 위협, 쫓아버렸다. 이것은 6·25를 통해 수 없이 겪은 비전투원들의 단복의 슬픔의 한 장면이었다.
적 4사단 16연대가 부곡리와 오항에서 도하하자, 주력도하를 창녕 쪽으로 판단했던 미24사단장 처친 준장은 당황했다. 부곡리로 도하한 적은 다행히도 지뢰밭에 빠져 포격과 기관총사격으로 격퇴됐지만 그 남쪽 오항에서는 완전히 기습도하에 성공했다. 여기서는 뗏목으로 건넌 적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옷과 구두를 머리위로 높이 쳐든 채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오항에서 8백명의 적이 피해 없이 전원 돌출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이 정면을 지키고있던 미34연대의 1중대는 모두 부근의 산정에 진을 치고 오항도 선장에는 한 명의 감시병도 없었다.
강을 건넌 적은 옷을 입고 소대단위로 종대가 되어 강변을 따라 남하했다.
8월6일 상오 1시에 4.2인치 박격포대가 이 적의 기습을 받고 이어 고곡리의 제3대대본부가 습격을 받아 분산됐다.
미 제34 연대장 찰즈·E·뷰참포 대령은 6일 상오2시 제3대대장 진즈·페레즈 중령으로부터 박격포 대와 대대본부가 병력미상의 적 기습을 받고 분산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뷰참포 연대장은 각 일선중대에 문의했으나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중대도 적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칠흑 같은 야밤중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적의 도하지점·방법·병력 등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후 돌출부의 첨단에 진을 치고있던 L중대로부터 중대좌익에 적 공격을 받아 그 일부가 밀려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연대장은 적은 유일한 자동차도장이며 가장 중요한 접근로인 박진도장에서 도하했다고 판단하고 아침에 제1대대로 하여금 반격케 했다.

<적 게릴라, 연락로 끊어>
그러나 이 반격은 적의 맹사로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만 냈다. 실패 이유는 적도 하지점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은 박진도장이 아니라 그 북쪽의 오항에서 도하했던 것이다. 처친 사단장은 돌출부의 적을 축출하려고 5일 동안 사단의 전 병력과 장비를 동원, 반격했으나 클로버리프 고지와 대황리 전면의 진지를 지키는 것만도 힘겨웠다. 사실 돌출부 안의 요충인 클로버리프와 대봉리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 주입이 바뀌는 혼전이 거듭되었다. 8월10일까지 북괴군 제4사단은 도하를 완료했다.
특히 포병대도 동안에 진출하여 14문의 포로 영산을 처음 포격했다. 또한 일부 적 게릴라 가 영산과 밀양간 도로에도 출몰하여 미24사단의 보급을 방해하는 동시, 24사단과 우군 25사단과의 유일한 연락교인 남지교를 습격했다. 바야흐로 파국적 위기가 돌출부에 다가왔다고 윌튼·워커 사령관은 판단했다.
그 외 이런 생각은 정확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8월15일 영산과 밀양 선을 가장 위급한 전선이라고 생각한 워커 장군은 돌출부에 미 해병여단의 투입을 결정했다. 에드워드·크레이그 준장이 지휘하는 해병대는 사천에서 싸우다가 킨 반격작전의 중지에 따라 바로 8월12일에 8군 예비대가 탔는데 3일만에 다시 격전지에 투입된 것이다(주=본 연재131, 132회 참조). 맥아더 원수는 장차의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 이 해병대를 휴식시키며 온존해 두고 싶었으나, 낙동강 교두보의전세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도 위급했다. 소화여단으로서의 해병대의 출동이 긴급히 요망되었다.
이 무렵에 2만의 해병대는 워커 장군의 주요 예비 병력이었다.
우군 24사단이 고지에서 적의 공격을 받으며 피를 흘리고 있던 8월17일에 해병대는 돌출부 안의 적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면 이때의 적4사단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도하에 성공하여 미 24사단에 중압을 가하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엄청난 곤경에 빠져있었다. 이 대목을 TR·페런바크 저『이런 전쟁』 (This Kind of War)에서 살펴보면….

<보급 어려워 적도난관에>
『돌출부에서 고지를 사이에 놓고 미군과 대치하고 있는 이건무 소장의 괴뢰군 제4사단은 큰 난관에 부닥치고 있었다. 약 1천5백명씩의 병력을 가진 3개 소총 연대로 공격하던 이 4사단은 클로버리프와 대봉리 전면에서 완강한 미군의 저항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보충 병력이 도착하기는 했으나 그 중에는 남한의 촌락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끼여있었고 많은 수가 군사훈련의 경험은커녕 무기조차도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보충병의 40%는 기회가 있는 대로 탈출했다. 공격에 쓸모가 없는 나머지 보충병들은 노무자로서 호를 파거나 탄약을 나르거나 식량을 조달하는 따위의 일을 시켰다.
이건무에게 이 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보급이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식량은거의 없다시피 했고, 강 건너편 돌출부에서 싸우고 있는 부대에 탄약을 보급하는 일은 날이 갈수록 더 어려워졌다. 북한에서 처음 가지고 온 탄약은 이미 오래 전에 바닥이 났고, 지나치게 깊게 뻗은 보급로가 미 공군의 폭격으로 차츰 마비되어가고 있었다. 중요한 대봉리 농성을 점령하고 있는 장기덕 대좌의 18연대는 8월14일 이후로는 탄약보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
가벼운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부서에 다시 배치되었지만 중상을 입은 자들을 도울 길은 전혀 없었다. 그들 중상자들은 그대로 죽어 갔다.
그러나 중국과 만주에서 싸운 적이 있는 괴뢰군 4사단의 분대장과 소대장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다.
일선 소대장과 분대장을 믿을 수 있는 한 이건무나 장기덕은 아직도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북괴 영웅이며 제1급 국기훈장의 소지자인 이건무는 8월 중순까지만 해도 후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정>=본 연재 136회 기사 본문 중 대구부근지명인 지천은 지천으로, 그리고 137회의 기사본문 중『김종원 대령을 부관으로 하고』를『김종원 중령을 보좌관으로 하고』로 각각 바로 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