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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중공군 개입(4)|홍군의 실태(상)
정권수립후 불과 1년만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성장과정을 대충 살펴보고 실제로 그들의 실태와 전투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관계 증인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중공군이 처음으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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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낙동강아 잘 있거라(7)|북괴군의 참상 (하)|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북괴가 낙동강의 마지막 결전에 투입한 총 병력은 13개 사단의 9만8천명이었는데 8군의 총 반격을 받고 살아서 38선을 도로 넘어간 자는 2만5천 내지 3만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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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증언(171)
낙동강전선에서 충반 격해 올라간 8군과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의 극적인 악수는 수원남방의 오산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는 여러 면에서 우연한 일치가 많았지만 8군의 제1기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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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8군의 총반격(1)낙동강아 잘 있거라(1)
인천의 기습상륙성공을 누구보다도 가장 기뻐한 것은「월튼·워커」장군과 그 휘하의 8군 장병이었다. 미8군은 근2개월 동안 손바닥만한 낙동강교두보에서 괴뢰군 13개 사단의 맹공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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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명의 부대(하)-학도의용병(3)
9월14일의 장사동 상륙 작전을 효시로 하여 지촌리과 당림리의 격전을 거쳐 12월19일에 한성여중에서 부대가 해체되기까지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의 자초지종을 관계자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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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0)|돌출부의 혈전(1)
낙동강은 창녕군 익산 서쪽으로 돌출하여 낙동강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은 거창·합천·창녕 지구로부터 영산을 거쳐 밀양과 삼랑진으로 이르는 요충 지대이다. 낙동강 교두보를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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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공방전(분초의 다툼)(2)
낙동강공방전초기의 피아전력을 비교해보면, 적은 병력과 장비가 한계에 이른데 반하여 아군은 상승일노에 있었다. 시간은 분명히 유엔군편이었다. 이때 누가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 공방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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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대전의 25시(6)|미 제34연대의 붕괴(하)|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T·R·페런바크 저『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 기록돼 있는 미 제34연대의 붕괴상을 계속 살펴보기로 하겠다. 『미 24사단장「월리엄·F·딘」소장은, 평택·천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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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한국전쟁 3년 (8) 스미드 기동부대 (하)
이때까지 몇 증인이 말한 「스미드」기동부대의 전투상은 단편적이어서 전체전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종합적인 전황은 역시 「T·R·페런바크」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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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남과 북의 형세 (6)|「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남침 준비 (6)
북괴가 남침 초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구사한 무기가 소제 T-34 탱크와 야크 전투기였다. 전자는 한국군 방어선 돌파에, 그리고 후자는 후방 민심 교란에 각각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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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남과 북의 형세(2)
북괴가 남침을 어떻게 빈틈없이 서둘러 준비했는가를 알기위해 당시 북괴에 있다가 그후 자유를 찾은 몇 민간인의 증언을 더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백봉씨(당시 북괴 최승희무용연구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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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6·25 20돌 옛 격전장서 만난 노병과 신병
꾀꼬리 소리만 들려왔다. 이따금 햇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느티며 떡갈이며 상수리-. 숲은 한결 푸르름을 떨치고 깊은 평화경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20년전 6월의 미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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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사관도 노렸다|생포된북괴「게릴라」김신조, 흉계를자백
청와대당국은 26일 북괴특공대로 남파되었다가 생포된 김신조의 신문내용을발표, 『북괴특공대의 당초공격목표는 청와대뿐아니라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간첩수용소등이 포함되어있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