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69)「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8군의 총반격(1)낙동강아 잘 있거라(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워커」장군울분 풀 기회>
인천의 기습상륙성공을 누구보다도 가장 기뻐한 것은「월튼·워커」장군과 그 휘하의 8군 장병이었다. 미8군은 근2개월 동안 손바닥만한 낙동강교두보에서 괴뢰군 13개 사단의 맹공을 받으며 숨막힐 것 같은 고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몇 차례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으면서도「워커」사령관은 인천상륙에 호응하여 반격준비를 서두르며「세기의 도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에 상륙한 「아먼드」장군의 10군단은 멀지않아 경인지구를 탈환하고 적의 보급 동맥을 절단할 것이다.
여기에 발맞추어 8군은 낙동강에 운집한 괴뢰군을 분쇄하고 북상하여 2백6㎞떨어진 10군단과 감격의 악수를 해야한다.
적 남침이래 항상 수세에 몰렸던 8군으로서는 이제사 울분을 풀 기회가 온 것이다.
9월15일 밤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진행중인 것을 확인한 「워커」장군은 9월16일 상오9시를 기해 8군에 총반격을 명령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날씨가 나빠 예정한 준비폭격과 표적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반격 첫날은 예상에 반하여 별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북괴군이 악천후를 이용하며 국지적 공세로 나와 8군은 진격은커녕, 현 위치를 지키는 게 고작이었다. 북괴군이 8군의 총반격을 받고도 처음 며칠동안 끄떡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러 내외자료와 적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북괴군은 총력을 기울인 9월 공세가 1주일도 안돼 실패의 징조가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대구와 부산점령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적은「유엔」이 군의 상륙작전에 관한 정보를 간간이 입수했기 때문에 서해지역방어사령부를 만들고 이에 대비했지만 실제로 전투부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9월 중순에 서울부근에 있던 제9사단 87연대와 제18사단과 독립 제849연대 등을 낙동강전선에 증파하여 대구 부산공격을 준비했다. 분명히 북괴군은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낙동강교두보를 돌파할 수 있으며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면「유엔」이 군의 새로운 상륙전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북괴, 주공목표 대구맹공>
인천에 대해서는 월미도의 방어를 강화하고 비어수로에 지뢰를 부설해두면 감히「유엔」군은 상륙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또한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유엔」군의 상륙전에 대비, 전투부대를 대기시키는 것보다는 이 병력을 낙동강에 투입하여 부산을 점령하는 게 전쟁을 종결시키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큰 오산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판명됐다. 여하튼 북괴군은 9월 중순에 증원부대를 낙동강에 급파하여 3차 공세를 계획했다.
이때의 주공목표는 역시 대구였다. 이래서 9월16일에「워커」장군이 총반격을 전개할 때에도 북괴군 전력은 아직도 완강하여 쌍방이 격돌하게 된 것이다. 16일에도 북괴군은 대구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반격에 나선 미 제1기병사단과 격전을 전개했다. 제5연대가 금무봉을 공격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마산방면의 미제25사단도 전투산과 필봉을 공격했으나 일기불순과 적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반격 초일에 낙동강교두보내의 창녕 방면 돌출부에서 고전하던 미2사단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23연대는 본소리 전면의 적을 공격하여 강변으로 진출, 성산리의 도하점을 점령했고 우익의 제38연대는 구룡산정을 탈취했다. 이 전투에서는 미「퍼싱·탱크」화력과 16일 하오부터 일기가 회복되어 출격한「머스탱」기가 큰 기여를 했다.

<한국군도 다부동서 역전>
한편 한국군은 다부동에서 역전하고있는 제1사단제11연대가 팔공산으로부터 가산을 공격하여 그 일부를 탈취했다. 가산은 대구분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로, 피아가 근 한 달이나 공방전을 벌여왔던 곳이다.
경주정면의 수도사단은 안강회랑을 거쳐 파계에 있는 적12사단을 공격했고, 포항의 제3사단은 형산강 남안에 진출하여 북안둑에 있는 적과 대전했다. 영천정면에서는 제6, 제7, 제8사단이 적 제8, 제15사단에 반격을 가했지만 특기할만한 진전은 없었다.
이상과 같이 8군의 총반격개시 첫날은 한국군 제1사단과 미제2사단이 부분적으로 진출했을 뿐, 전반전세는 반격전과 별다름이 없었고 대구전면에서는 미제1기병사단이 여전히 적의 중압을 받고 있었다.
반격 제2일째인 9윌17일의 전세도 큰 변화는 없었다. 제1기병사단은 이날도 사력을 다해 금무봉과 왜관북쪽의 203고지를 공격했지만, 적의 치열한 야포·박격포·수가탄의 탄막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마산방면의 미제25사단도 포병2개 대대의 지원을 받고 전일에 이어 필봉과 전투산을 공격했지만 점령할 수 없었다. 한국군 각 사단의 진출도 대체로 16일의 선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다만 창녕방면의 미제2사단이 16일에 이어 17일에도 적 제2사단에 공격을 가해 이를 낙동강 동안에서 완전히 몰아냈지만, 부곡리 다리가 파괴되어 서안까지 진출할 수는 없었다. 이상과 같이 17일에도 창녕 돌출부의 적 제2사단이 낙동강서안으로 후퇴했을 뿐 적의 전의나 화력은 전혀 쇠퇴할 기색이 없었다.

<인천상륙성공 의심하기도>
인천상륙에 모든 기대를 걸고, 총반격을 전개한 8군으로서는 이런 전세의 부진은 분명히 해괴하고도 여간 실망과 초조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었다.「맥아더」원수나「워커」장군 할 것 없이 모든 한미지휘관들은 인천에 10군단이 대거 상륙만 하면, 낙동강교두보의 적세는 급속히 쇠진 붕괴하리라고 믿고있었다. 그 일례로 이때 포항 형산강에 포진한 한국군 제3사단장 이종찬 준장은 적이 여전히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을 보고「유엔」군이 정말 인천에 상륙했나고까지 의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낙동강의 전세를 보고 받고「맥아더」원수는 누구보다도 초조와 고민에 사로잡혔다. 원수의 예측으로는 인천상륙이 성공하면 그 충격으로 낙동강의 괴뢰군주력은 즉시 붕괴하기 시작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8군이 총반격을 전개한지 2일이 지났지만 전세는 대동소이였다. 「맥」원수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이었다.「맥」원수의 머리에는 인천상륙을 한결같이 반대하고 군산상륙 대안을 내놓던 참모본부요원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역시 로튼·콜린즈 육군참모총장과「포레스트·셔먼」해군참모총장이 지적한 것처럼 인천은 낙동강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들 말대로 군산에 상륙했어야 했는가. 그러나 이미 인천에 상륙한 이상 빨리 다른 수를 써야 한다. 속히 낙동강전선을 점령하지 않으면「유엔」군병력이 양분돼 있는 동안에 각개격파를 당할지도 모른다.
「매」원수는 심사숙고 끝에 군산에도 상륙할 결심을 했다. 즉 낙동강전선을 울산의「데이비드슨」선까지 후퇴, 축소하여 거기서 미군 2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사단을 빼내 10월15일에 군산에 새로운 상륙전을 펼 생각이었다. 인천기습 상륙성공을 기뻐할 사이도 없이 태산같은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다시 2일만에「맥」원수는 드디어 낙동강의 적이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낭보를 받고 자기 추측이 며칠 늦게나마 적중됐다는 새로운 자신을 갖게 됐으며 군산상륙계획은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북괴군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양면작전을 효과 있게 수행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였다. 김일성은 우선 인천에 상륙한 미10군단을 격파할 생각으로 낙동강방면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현 전선을 유지하면서 일부 병력을 수원지역으로 전용하라고 명령했다. 이래서 제일 먼저 남침대열의 선두에 섰던 제105기갑사단이 16일에 은밀히 왜관전선을 이탈해서 수원으로 향했다. 그들은 낙동강전선보다도 경인지구 전선이 더 중요 위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책은 제1선 부대에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극비에 붙이고 현 전선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들이 인천상륙을 얼마나 숨기려고 했었나 하는 것은 남침 때는 2군단 작전부장이었으며, 9월20일 다부동에서 미제1기병사단에 투항할 때에는 적13사단 참모장이었던 이학구 총좌 조차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본 연재133회 참조)

<상륙 알려지자 급속히 붕괴>
적의 이런 기도에도 불구하고 18일께부터 두 전선이 모두 붕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날 김포비행장이 미 해병대 수중에 들어가고 영등포가 위협을 받게 됐다. 이렇게되자 북괴는 전선정비를 결심하고, 서울을 확보하면서 전선의 우익을 금강과 소백산맥의 선으로 후퇴시켜 신 전선을 형성하려고 했다.
김책은 낙동강에서 현풍 창년 마산방면의 제1군단을 먼저 축차적으로 금강선까지 후퇴시키기로 하고 동부와 중부의 제2군단에 대해서는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특히 제1군단과 2군단의 접촉지점인 왜관지역은 후퇴작전을 순조롭게 하기위해 사수하라고 엄명했다. 왜관주변, 특히 금무봉과 203고지에서 적3사단이 반격하는 미제1기병사단에 끝까지 저항한 것은 이때문이었다. 즉 미1기병사단이 왜관지역을 돌파하면 적 제1군단은 퇴로가 차단되는 것이다.
김책의 명령에 따라 제1군단장 김웅(1952년 패전책임을 물어 숙청)은 우선 최남단의 제6, 제7사단을 후퇴시키고 그 다음에 제9, 제4, 제2사단에는 20일에 거창 방면으로 반전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김책의 낙동강 전선후퇴계획이었지만, 21일에 이르러서는 제1군단은 물론 김무정의 중·동부 제2군단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22일께부터는 이때까지 사단참모장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유엔군의 인천상륙소식이 어느새 사병에까지 퍼지기 시작하여 북괴군은 급속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