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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남과 북의 형세 (6)|「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남침 준비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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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괴가 남침 초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구사한 무기가 소제 T-34 탱크와 야크 전투기였다. 전자는 한국군 방어선 돌파에, 그리고 후자는 후방 민심 교란에 각각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개의 대전차 지뢰도 갖지 못했던 국군은 느닷없이 나타나는 육중한 이 「무쇠덩이」앞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제1격으로 38선 전방 방어선이 뚫리고 적침 3일만에 수도가 함람된 것은 주로 탱크 때문이었다고, 당시의 군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괴뢰군 야크기 제공권 장악>
한편 적 「야크」전투기는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한국 상공을 제멋대로 난무했다. 이미 본 연재에 단편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야크 전투기들은 국무회의와 국회가 개회되고 있는 중앙청에 기총소사를 가하는가 하면 용산역·여의도·김포·인천·수원 등 요소를 누비며 비행하여 후방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정부가 26일 한밤중에 황급히 환도를 결정한 것도 다분히 이 「야크」기의 도량이 작용한 것 같다. 각료들이 이 문제를 의논할 때 공교롭게도 「야크」기가 바로 중앙청에 내습했었다. (주=본 연재 제4회 참조).
이렇게 남침 초에 위세를 부리던 적 탱크와 야크 기도 미군이 참전하게 되자, 차츰 무력화했다. 그러나 괴뢰 공군은 압도적인 미 극동 공군의 일격으로 분쇄됐지만, 그들 탱크는 대전에서 미경 탱크, 셔먼을 누르고 낙동강 공방전 초기까지는 버티다가 궤멸했다.
그럼 이제 북괴 남침의 가장 효과적 주무기였던 탱크와 공군기의 편성과 증강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북괴 공군의 창설 과정을 북괴 공군 소위 MIG 조종사로 있다가 1960년에 자유 대한으로 탈출한 정낙현 소령 (공군 본부 근무·34)으로부터 들어보면….
『나는 6·25때는 14세의 어린 중학생이었지만 그후 괴뢰 공군에 들어가 보니 그들이 8·15 해방과 더불어 공군 건설에 혈안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1945년 10월부터 벌써 신의주·평양·용강·청진 비행장을 정비하고 공군 요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지요.

<50명으로 신의주 항공대 편성>
신의주에서는 일본 민간 항공 출신으로 수천 시간의 비행 기록을 가진 이활·임운봉·전경하·강대용 등을 중심으로 일본 비행 학교 출신 20여명과 중국 출신 10여명, 기타 항공 기술자 20여명을 모집, 도합 50여명이 주동이 되어 신의주 항공대라는 것을 조직했지요.
이 항공대는 각지의 소위 열성 분자 중 우수한 학력을 가진 자를 선발하여 조종 교육대·정비 교육대·통신 교육대를 각각 조직하여 본격적인 교육을 시켰지요.
대장 이활은 신의주 비행장 주둔 소련군 책임자 「막시노프」소령으로부터 일제 95식 연습기 3대를 인수받아 비행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 항공대는 처음에는 민간의 성격을 띠었지만 소련군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으며 초대 소련군 고문에는 맥심 소령이 임명됐지요. 1946년1월에 신의주 항공대는 제1기생 80명을 훈련 졸업시키고 제2기생 1백60명을 모집했는데 4백여명의 지원자가 있었어요.
한편 1946년4월에 진남포에 평양 학원이 설립, 비행과가 생겨 신의주 항공대는 평양으로 옮겨 이 학원 비행과에 흡수됐지요. 과장에는 왕련이, 부과장에는 앞서 말한 이활이 취임했지요. 이때만 해도 북괴는 비행기가 부족하여 대원들에게 사상과 기술 교육에만 치중했지요. 그러나 1948년2월8일에 북괴군 창설 선포와 함께 항공대도 공군으로서 면모를 갖출 준비를 서둘러 9월에 북괴 정권 수립과 함께 정식 공군으로 발족, 본격적으로 부대 확장에 나섰지요.

<괴뢰 정권서자 공군 확장>
1948년에 처음으로 북괴 공군 제25연대가 편성됐고, 이해 10월에는 평양 비행장을 소련군으로부터 인수받고, 전부대가 그곳으로 이동했읍니다.
이때 소련 공군으로부터 이양 받은 훈련기로 본격적인 조종 교육이 실시됐지요. 이때 훈련받은 약 40명의 조종사들이 소련에 가서 재훈련을 받고 돌아왔지요. 평양 비행장에서의 특별 훈련은 전원 영관 급인 소련 공군에서 담당했지요.
1948년 말에 소련군이 교관을 제외하고 일부가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IL-10」과 「야크 9」를 인수하여 북괴는 상당히 우수한 공군기를 갖게된 셈이지요. 1949년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하고 「IL-10」과 「야크 9」등 30대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북괴군은 대폭 증강됐읍니다. 이때 40명의 북괴 조종사가 「야크」기 조종 훈련 차 소련으로 또 갔지요. 1950년 초에 북괴는 항공 연대를 사단으로 승격시켜 동사단안에 습격기 연대·추격기 연대·교도 연대의 3개 연대를 두었읍니다.
그들은 군용 비행장 확장도 서둘러 38선에 가까운 신막과 평강에 새 기지를 건설했어요.
50년4월에 북괴는 다시 소련으로부터 「IL-10」과「야크 9」60대를 추가 도입하여 습격기 연대와 추격기 연대에 배치했지요. 6·25 나기 2일 전인 23일에는 소련 조종사들이 20대의 「야크」기를 직접 몰고와 연포 비행장에서 괴뢰군에 넘겨주었읍니다. 이리하여 북괴 공군은 남침 직전에 「IL-10」과 「야크 9」등 2백대의 전투기와 조종사 2백명, 정비사 4백명, 그 밖의 요원 2천여명이 탄 강력한 공군을 보유하였던 것입니다. 전투기가 한대도 없던 한국 공군에 비하면 실로 천양지차였지요.』
한편 북괴군 탱크 부대의 편성도 재빨랐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 북괴군 탱크 부대의 창설과정은 다음과 같다. 원래 소련군은 북한 진주 당시 1개 사단이 탱크를 가지고 나왔는데 이들은 남침용으로 이 탱크를 북괴에 고스란히 넘겨줄 심산이었다.
소제 T-34 탱크는 l94l년에, 소련이 대독 전쟁에서 사용한 주무기였으며 늪(소) 지대에서도 자유롭게 기동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주한미군 고문들은 논밭이 많은 한국 지형에는 탱크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47년에 탱크 대 창설>
북괴가 처음으로 탱크 부대 창설에 손댄 것은 1947년5월께부터였다.
평양에 제225 탱크 연대를 창설하고 그해 말에 연대기간 요원들을 각 고등학교에 체육 교사로 위장 침투시켜 체격이 좋은 학생들을 선발했다.
이런 식으로 약 4백명을 모병 하여 소련군 교관이 이들에게 탱크 운전·포 조정·통신 등을 훈련시켰다.
괴뢰 정권 수립 후인 1948년11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 소련 탱크 사단은 약 1백대의 탱크를 북괴군 제115연대에 넘겨주었다. 이때 북괴병들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탱크를 운용할 수 있었다.
소련 군사 고문은 북괴군 전반에 걸쳐 철저한 감시와 감독으로 관여했지만, 특히 탱크 부대의 육성 강화에는 제일 힘을 기울였다.
소련은 기갑 전술의 권위자로 구성된 특별 군사 사절단을 파견하여 북괴 탱크 부대에 배속, 모든 것을 관장케 했다. 1949년5월에 북괴는 남침을 1년 앞두고 탱크 부대를 크게 확장했다.

<탱크 주력 38선으로 이동>
제l15 탱크 연대를 제105 탱크 여단으로 개편하고, 그 밑에 제l07, 제109, 제203의 3개 연대를 두었다.
1개 연대는 각각 36대의 탱크를 보유했고, 이밖에 이 여단에는 60여대의 자주 포를 장비한 「사마호트」대대, 경기관총으로 무장된 「모타지클」2백 대를 가진 제303 기동 정찰대, 보병 연대, 통신·수송 대대를 각각 보유하고 있었다. 기갑 부대로 하등 손색이 없을 만큼 완전한 장비와 병원을 갖추었다.
1949년10월에 제105 탱크 여단의 제107 탱크 연대는 황해도 남천으로, 그리고 제109 탱크 연대는 강원도 철원으로 각각 이동했다. 남침을 앞두고 38선 가까이 탱크 주력을 옮긴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동 여단은 실내 학술 교육은 대폭 줄이고, 주로 야외에서 전투 훈련에만 주력했다. 1949년 10월 하순에 북괴군은 대대적인 기동 작전 훈련을 실시했는데 이 제l05 탱크 여단이 전군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점을 받았다.

<남침 두달 앞서 t34백대 인수>
남침을 두달 앞둔 1950년4월말께 소련의 각종 장비가 쏟아져 들어왔는데 제l05 탱크 여단에는 탱크 1백대, 「사마호트」60대, 트럭 l백50대가 배당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105 탱크 여단은 남침직전까지 8천8백의 병력에 T-34 탱크 2백여대,「사마흐트」1백50대, 「모타지클」5백50대, 트럭 3백80대의 어마어마한 장비를 갖출 수 있었다.
북괴군 보유의 탱크 댓 수에 대해서는 1백50대서부터 2백40대까지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2백대 안팎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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