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또 다른 일등 국가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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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경희대) 교수가 쓴 책을 읽었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란 책이다. ‘하버드대 박사가 본 한국의 가능성’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표지를 장식한 그의 얼굴 위로 “아시아에 등장할 또 다른 일등 국가는 한국이다”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도드라져 보인다.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 이름은 이만열이다. 한국인 출신 부인의 성(姓)을 취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만나 얘기를 나눠 보니 본명보다 한국 이름이 더 어울려 보였다. “요즘 가끔씩 영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나 애를 먹는다”고 우리말로 능청을 부릴 정도다. 그는 한·중·일 3국의 고전문학과 역사를 깊이 팠고, 그걸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견식이 그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걸 부끄러워하자 “전혀 그럴 필요 없다”며 “나는 그걸 전공한 사람”이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한국은 인구 2000만 명이 넘는 나라 중 식민지를 경영한 경험 없이 선진국이 된 세계 최초의 사례라고 지적한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소말리아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지녔던 한국이 불과 두 세대 만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된 근본적 배경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바로 한국의 과거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수천 년간 지속된 지적·문화적 전통이 있었기에 그런 기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새우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과거를 부정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한다. 한국이 일등 국가가 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자신들의 과거에 있는데 왜 그 ‘보물’을 무시하고 외면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와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한국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서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코리아 프리미엄’을 누리고도 남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100% 동의하긴 어려운 건 왜일까. 긍정보다 부정, 낙관보다 비관에 길들여진 먹물적 근성이나 자학적 식민사관의 잔재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칫 ‘문화 결정론’의 함정에 빠져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문화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의 문제다. 한국의 문화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만큼 소말리아의 문화도 값지고 소중한 것 아닌가. 각자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살려 성장과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 것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이다.

 남북한의 격차를 어떻게 설명할지도 의문이다. 남북한은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같은 종족이고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북한은 선진국은 고사하고,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체제의 차이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문화적 전통보다 체제의 차이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1979년 에즈라 보겔(하버드대) 교수는 『일등 국가 일본』이란 책을 썼다. 출간 즉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러나 “재팬 이즈 넘버 원(Japan is Number One)”을 외치며 기세 좋게 나갔던 일본은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20년을 허송했다. ‘아베노믹스’란 이름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체제도 중요하고, 문화적 전통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의 선택이다. 어떤 리더십을 선택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요즘 주변에 보면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계층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사회는 갈라져 허구한 날 패싸움이다. 어느 편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설 땅이 없다. 참신함과는 거리가 먼 ‘올드보이’들의 귀환과 함께 대한민국이 197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탄식도 들린다.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과 국정 운영 스타일에 대한 걱정이다. 고공비행을 하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에 최근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한 것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은 탕평과 대통합을 약속했지만 갈등과 분열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반대편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것이 통합이라고 믿고 있는 건 혹시 아닐까. 깨알 같은 지시만 있지 토론다운 토론은 안 보인다. 밤잠을 설쳐가며 꼼꼼하게 보고서를 읽는다니 그게 되레 걱정스럽다. 지금 청와대의 공기는 자유롭지도 여유롭지도 않아 보인다. 숨막힐 듯한 침묵만 보인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문화가 융성하고, 창조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페스트라이쉬 교수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일등 국가 한국은 요원해 보인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