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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70) <문자는 필자>|<제5화>「동양극장」시절(9)|박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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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우 차홍녀>
「청춘좌」에 웬만한 여배우는 모을 만큼 모았다. 그러나 정작 이렇다할 여배우가 없었다. 소위 「니마이」(이매)라는 여주인공감이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물색을 하던 중 권일청이라는 친구를 만나 소개를 받고 빼내온 것이 변두리로만 다니는 지방 극단에 그나마 들어간지 얼마 안 되는 촌티가 나는 차홍녀였다. 내 보기에 오히려 해맑게 생겼거나 오래 치여서 「투」가 생긴 것보다는 흙 묻은 김장 무 같아서 두들겨 만들기가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촌닭」을 데려다가 수개월 동안 환경과 분위기에 젖도록 했다. 그러자 각본이 달려서 「일본 명작 주간」이라는 간판을 걸고 일본 작가 국지관의 『아버지 돌아오다』, 산본유삼의 『영아살해』, 조아주가오낭의 희극 『월급날』을 번역해서 상연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영아살해』에 주역인 날품팔이 여인부를 차홍녀에게 맡겼다. 큰 극단에 와서 가뜩이나 어리둥절한 「촌닭」에게 대역을 맡기니 선임 여배우의 불평은 그만두고라도 차홍녀의 가슴은 팔딱팔딱 뛰기만 했다. 그런 중에도 연극을 3, 4일만에 갈아치우는 판이니 연습인들 제대로 할 틈도 없거니와 대사도 욀 틈이 없었다.
그런 판에 그런 대역을 하라니 못하겠다는 말은 감히 못하고 하도 겁이, 나서 울어버렸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홍녀야 울 틈에 대사를 들여다보고 내 한마디한마디 일러주는 것을 그대로 동작으로 옮겨라. 그리고 대사 못 외운 것은 「프롬프트」를 잘 들어라.』그렇게 해서 대강 연습이라고 한 다음 막을 열었다.
이 『영아 살해』란 연극은 지극히 가난한 여자에게 젖먹이가 하나 있는데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조석을 끓일 수도 없거니와 먹지 않으면 젖도 안나왔다. 그러나 일자리 공사만으로 나가려면 어린것을 두고 나가야하고, 나간댔자 푸짐한 일거리 차례가 오지도 않았다. 돈을 못 벌어먹지 못 하니 젓도 안나오고 그럴수록 어린것은 보챈다. 결국 그 어린것이 불쌍해서 죽인다. 그래서 파출소에 끌려가 순사 앞에서 울며불며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인정 있는 순사가 동정하면서도 본서로 연행하는 것이다. 파출소 문을 나서자 눈이 내린다. 그냥 갈 수 있건만 순사는 지우산을 펴서 그 여인에게 받혀준다. 그때 신파극은 비극의 끝 장면에는 으례 비 아니면 눈이 왔다.
이런 묵중한 연극의 주역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그때는 길거리에서 볼 수도 없는 「여토방」 (일어=여자 인부) 역을 하자니, 너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홍녀에게 『일러 준대로 흉내나 내라』하고는 장치에 마련된 들창 뒤에 숨어서 일일이『서라』『앉아라』『울어라』하고 인형 놀리듯 했다. 그랬더니 홍녀는 외형뿐만이 아니라 내면인 심리 표현까지 곧잘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막이 내린 후 『홍녀야, 너는 훌륭한 여배우가 될 것이다』했더니 그녀는 『선생님이 죽으라 하시면 죽기라도 하겠어요』하고 대답했다. 이래서 그녀는 내 말과 가르침을 하늘같이 믿고 따랐고, 나는 그녀를 전심을 다해 지도했다. 그래서 다른 여배우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차홍녀는 별로 교양도 없으면서 이지적인 자태가 몸에 배었고, 얼굴이 예쁘지는 못했으나 무슨 역이든 맡기면 능히 알맞게 잘해냈다. 그녀가 일약 인기 정상의 명배우가 된 것은 그 얼마 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1급 신파극에서였다.
l939년 가을에 동양 극장의 주인이 갈리는 바람에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아낭」이라 하는 극단을 만들고 동대문 경찰서 관하에 있는 제일 극장을 무대로 삼았다. 그랬더니 동양극장의 새 주인은 중진 인물이 몽땅 빠져나가 「아낭」을 만들었으니 허가를 해주지 말라고 해서, 동·서대문구 경찰서끼리 싸움이 벌어졌던 일도 한때의 일화다. 그래서 차홍녀는 「아낭」 창립 동인으로 지병인 가슴앓이를 무릅쓰고 한번 공연에도 빠짐없이 출연했고, 지방 공연에도 물론 나가야 했다.
차홍녀의 그때 여배우로서의 이름은 경향에 높아서 차홍녀가 출연 안 한다면 표를 안 사는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1940년 겨울 「아낭」의 그 당시 북선 공연 때 병이 더쳐, 이내 천연두가 되어 차마 볼 수 없는 형용으로 앓다가 24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연극인 동지들이 정성과 슬픔과 아까운 마음으로 연극 사상 최대 최초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화장 장 불구멍으로 집어넣을 때 관을 끌어안고 눈물 바다를 이루었었다.
오늘에도 동양 극장에서 배출된 이름 높은 여배우가 여럿 있지만, 다시는 못 볼 차홍녀는 가끔 생각이 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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