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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낙동강 공방전(10)|동부전선(7)|「6·25」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적, 기계에 2차 대 공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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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3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공방전인 기계·안강전투는 2개의 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장은 적8월 공세 때에 14일부터 18일까지 전개된 전투에서의 아군의 대승이고, 제2장은 적 제2차 공세 때에 8월26일부터 9월17일까지 적 대부대와 수도사단간에 벌인 대규모의 소모전이다. 제1장 전투는 두말할 것 없이 아군의 일방적 승리였지만 제2장 전투에서는 피아가 막심한 출혈을 강요당했으며 때로는 아군이 「궤멸」일보직전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제2장의 전투가 이렇게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8월 공세 때 포항에 진입했다 큰 타격을 받고 비학산으로 후퇴한 적 12사단이 급히 재편 강화됐을 뿐만 아니라 타 전선에서도 일부 병력을 전용 보강하여 단숨에 기계·안강을 거쳐 경주로 돌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군으로서는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탓도 있지만 「유엔」군이 속속 내한중인 이때에 국군이 이상 후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세계에 주려는 정치적 요인도 다분히 작용했다. 이래서 어느 면에서는 무리하게 진지를 사수하다가 필요이상의 희생을 낸 흠도 없지 않았다.

<적 병력 보충 후 반격>
▲김희준씨(당시 수도사단17연대장=대령·예비역준장·현 건설공제조합감사·49) 『8월10일께에 현풍에서 미24사단과 합동작전을 하고 있다가 육본으로부터 안강으로 가라는 작명을 받았어요. 기계·안강에서의 제1차 전투는 8월18일자로 일단 끝났는데 14일부터 18연대가 기계북방 도평리 입암리를 통해 기계의 적 사단 배후를 기습했어요.
17일에 17연대가 적과 대결하고 있는 고지에서 보니까 적들이 대 혼란에 빠집데다. 우리 17연대로 내리쳤지요. 적 사단은 완전히 궤멸되어 각개분산으로 비학산을 향해 도망쳤어요. 이때 l8연대 1대대(대대장 장춘권 중령)가 기습에 큰공을 세웠어요. 8월 26일께 17, 18연대가 비학산을 공격해 올라갔더니 적은 그 동안 대병력을 집결해놓았다가 무섭게 반격해 나옵데다. 사실 1차 공세 때 적 사단장이 맨발로 도주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새 그렇게 많은 병력이 집결해 있을 줄은 생각 못했어요.
여하간 적의 역습으로 기계를 빼앗기고 다시 남방5㎞의 연접고지에 17연대는 방어선을 쳤어요. 18연대와 1연대는 우리좌우에 포진했구요. 이때부터 피아가 격돌해서 엄청난 소모전이 계속 됐읍니다.
우리 연대에서만 하루에 최고 3백 명이 전사한때도 있어요. 기습이나 포위를 당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났어요. 적은 물론 우리이상의 피해가 났구요. 이 전투에서 우리연대는 8기생을 주로 하는 소대장급의 소위·중위들 50여명이 거의 전원 죽거나 다쳤읍니다. 보충해 오면 또 며칠안가 사상하고… 나중엔 상사 50여명을 모아놓고 연대장권한으로 즉석에서 소위로 임관, 일선에 내보냈어요. 육본에 보고를 했더니 7일만에 현지 임관통지가 옵데다. 이 동안에 상사에서 벼락 소위가 된 50여명도 거의 전원이 전사했어요. 할 수 없이 중사급을 소집해 또 소위계급장을 붙여 주고… 이렇게 보고-통지-임관-사상이 반복됐죠.

<후퇴한 연대장 총살위협>
기계와 안강의 중간 연접고지방어전에서는 두 가지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하나는 사단장 백인엽 대령의 후퇴명령을 받고 기계를 포기했는데도 부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연대장인 나를 찾아와 무단후퇴 했으니 총살하겠다는 거예요. 결국 해명은 됐어요. 다른 하나는 연접고지 중 제일 높은 데를 방어하고 있던 제3대대장 전우영 소령이 바로 왼 눈 옆에서 뒤통수를 관통하는 총격을 받고도 살아난 거예요. 8월말일인 것 같은데 새벽에 무전으로 전 소령을 「독수리 독수리」하고 불러 전황을 묻는데 난데없이 제3자의 목소리가 끼어 들면서 욕설을 해요. 「너 누구냐」했더니 「인민군연대장」이라면서 「넌 누구냐」고 되물어요.
「나도 국군 연대장이다」라고 수인사(?)를 했지요. 그자는 「엎어지면 부산에 코가 닿는데 빨리 항복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면서 마구 욕설을 합데다. 나도 곧 「유엔」군의 총반격전이 시작되어 너희들은 귀주할터니 너나 항복하라」고 응수했지요. 그러다가「독수리 독수리」하고 부르는데도 대답이 없어요. 조금 있다가 3대대의 고지에서 사병들이 쫓겨 내려오며 대대장은 전사하고 고지는 빼앗겼다는 겁니다. 대대장시체를 왜 못 가지고 왔느냐고 기합을 주고 연대CP의 병원과 3대대장병을 내가 직접 끌고 문제의 고지를 역습했읍니다. 날이 샐 때 겨우 탈환했는데 고지 위에는 6명의 부상한 적병이「동무들 우리를 버리고 가기요」하면서 울고 있읍데다.
온통 피범벅이 된 전 소령의 시체(?)를 끌고 내려와 전사로 보고를 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런 관통상을 입고 정신도 이상 없이 살아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입니다. 의학적으로도 10만 분의 1정도의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전 소령 외에도 이관수 이일수 이인용 오익경 소령 등 17연대에서 9명의 대대장이 기계전투를 전후해 부상 혹은 그 밖의 이유로 교대됐어요.
9월초에는 24시간 계속된 근접전과 육박전등 적의 중압으로 연접고지방어선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됐어요. 이 무렵에 송요찬 장군이 부상한 백인엽 대령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어 안강읍 내 국민교에 사단 CP를 두고 17연대는 좀 앞으로 나와 지서에 있었으며 이모대령이 신설연대를 끌고 와서 우리 17연대 좌측에 있었어요.

<신설연대 연대장 행방 감춰>
이때까지 17연대는 부연대장이 공석이었는데 신성모 국방의 비서실장이며 나의 동기생인 신동우 중령(현 경향신문전무)이 부연대장으로 왔어요. 전선이 하도 위급하니까 불급한 후방장교들을 몽땅 최전선으로 배치한 거지요. 신 중령은 10여명의 후방장교를 데리고 수도사단에 왔더군요. 점차 적의 압력이 가중되어 신 중령이 온날 그날 밤에 후퇴명령을 못 받는다면 전선이 뚫려 전멸 당할 위기에 있었어요.
「마침 잘 왔다. 나 혼자 죽는 줄 알았더니 황천길친구가 생겨서 위로가 되는군」했더니 신 중령은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입데다. 초저녁에 둘이서 연대CP인 초가에서 병력배치도를 놓고 「플래쉬」로 비치며 전투지휘를 하고있는데 이웃신설연대의 신임부연대장 모 중령이 찾아와서 사정을 합데다. 사연인즉 연대장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나더러 자기연대까지 통합지휘 해달라는 겁니다. 기가 막혀서…. 내 연대지휘에도 힘에 겨운데 말이 됩니까? 못하겠다고 거절했지요. 이날 새벽3시쯤 송사단장으로부터 후퇴 명령문이 왔어요. 이것을 사단본부의 모 영관급 장교가 저녁때 안강역까지 갖고 왔다가 사태가 하도 위급하니까 역전의 대전차포중대장에게 그냥 던지고 가버렸어요.
중대장이 이것을 가지고 온 거예요. 17연대는 곧 안강 남방의 곤계봉으로 후퇴했지요. 지금도 의문인 것은 이웃 신설연대에도 후퇴작명이 과연 전달됐느냐하는 거예요. 어쨌든 우리17연대가 후퇴한 다음 신설연대는 적 중압으로 분산됐어요.
송사단장은 신설연대장 이모대령을 문책하겠다고 노발대발하여 며칠을 찾았는데 그후 흐지부지됐어요. 이때 또 김백일 장군이 무단 후퇴했다고 나를 찾아와 문책합데다. 이번에는 신동우 중령이 송사단장 「사인」이 있는 후퇴작명 문을 간직하고 있다가 제시하여 무사했지요. 곤계봉도 또 뺏기고 봉남쪽 개울건너에 진을 쳤지요. 그리고 낮에 2개 대대로 공격해 8분 능선까지 올라가고 1개 소대는 정상을 점령, 만세를 부르는데 뜻밖의 참화를 당했어요. 미 군기2대가 갑자기 나타나 고지정상에 「네이팜」탄을 퍼부어 만세를 부르던 1개 소대원이 거의다 죽었어요. 국군이 곤계봉 공격을 개시하면 미 군기가 정상을 때려주기로 돼 있었는데 우리부대가 너무 빨리 정상을 탈환하여 이런 참변이 생긴 거지요. 여하간 이런 처절한 전투가 9월16일께까지 계속되다가「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진이 시작됐지요.』
다음은 이 전투에서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대대장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고지점령 소대 오폭 전멸>
▲전우영씨(당시 수도사단17연대 제3대대장=소령·전대법원행정처장·예비역준장·현 광업협회고문·52)『비학산으로 쫓겨간 적을 17, 18연대가 추격하는데 오히려 그들은 대병력으로 반격해왔어요. 그들의 소위 9월 최후 공세지요. 우리대대는 기계남방 구연봉 선으로 밀려 제6고지를 방어하다가 나는 운명적인 총격을 당했읍니다. 8월28일 새벽인 것 같은데 대대OP에서 연대장과 무전대화를 하는데 적의 목소리가 끼여들었어요. 서로 한바탕 욕설을 퍼붓다 보니까 농선 위의 우리대원들이 쫓겨옵데다.
대대 OP의 장병들과 후퇴하는 대원을 모아 내가 권총을 빼들고 반격해 올라갔지요. 빼앗긴 능선을 거의 탈환할 무렵, 10m쯤 앞에 엎드렸던 적병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나에게 따발총을 난사했어요. 얼굴이 뜨끔하면서 쓰러지고는 정신을 잃었어요. 6시간 후에 연대장이 다시 제6고지를 탈환하고 나의 시체(?)를 찾았대요. 연대장은 전대대장은 전사했다고 선언했는데 어느 군의장교가 보니까 아직 숨을 쉬고있어 가마니에 싸 후송했답데다. 총탄은 왼쪽 바로 눈 아래에 맞고 왼쪽귀 뒤 10㎝쯤의 부분으로 빠져나갔어요.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났는데 이런 관통상을 입고 정신이상도 없이 회생한 예가 없다고들 합데다.
보는바와 같이 지금도 내 입이 꽤 비뚤어져있지만 그때는 안면신경이 죽어 입이 거의 오른쪽귀밑에 몰린 것을 온갖 치료를 다해 이 정도나마 원상복구를 시켰지요.』
한편 안강·기계의 제1차 전투승리에는 청송에서 큰 타격을 받고 재편된 기갑 연대도 한몫을 했다.
▲백남권씨(당시 육본 직할 기갑연대장=대령·예비역소장·현 인천제철감사·49)『청송서 너무 큰 피해를 보아 대구서 재편할때에는 병력이 1천4백 명에다 장갑차는 1대뿐이고, 말은 5, 6필 정도였어요. 8월 중순에 기갑연대는 기계 북방 도평리에 진을 쳤지요. 8월 공세 때의 기계의 적은 예비대가 없었고 남쪽인 안강을 향해 주력을 돌렸어요. 그래서 의성 방면에서 기계로 수송하는 적 보급부대를 손쉽게 여러 차례 때려부쉈지요.
「트럭」과 달구지 부대 등을 큰길에서 포착하여 불질러 버리구요. 4일간 허술한 적의 후방을 공격한 끝에 기계를 점령, 안강 쪽의 적을 포위망 속에 몰아넣었어요. 기계전투에서는 소제 1백22㎜ 박격포 20문 등 많은 무기를 빼앗고 포로도 1백20명이나 잡았읍니다. 기계를 점령하고 보니까 적병시체도 많았지만 말(마) 시체가 들판에 즐비하게 깔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릅데다. 이 지역에서 적의 1차 공세는 쉽게 분쇄했지만 그들의 2차 공세 때에는 정말 치열한 혈전이 전개됐지요.』
※알림=다음의 학도의용군관계 증인은 곧 중앙일보로 연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유양희씨(당시 묵호서 제3사단 학도 의용 중대종군·현 부산시거주)
▲김일호씨(당시 제3사단 학도의용대2소대장·중대생) 연락처=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 28-821l (교환)의74번 야간은 93-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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