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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30·실종 2명 질자호침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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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수=본사임시취재반】전남여수구항앞 질자호 충돌사고는 8일상오 현재 승객 93명(이중 선원6명) 가운데 30명이 익사하고 2명이 실종, 61명이 구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수부두에서 불과 1백50m앞 해상에서 여천군화정면개도를 떠나 여수로 들어가던 여객선 길자호(24·4t·선장 김삼돌·48)가 대일선어수출선 제12 삼행호(60t·선장 박재근)에 들이받혀 마중나온 승객들의 가족친지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침몰되고 말았다. 여수구항 부두에는 가라앉은 배의 인양과 구조작업등으로 7일하오 한때 큰 혼잡을 빚었다. 특히 마중나왔던 가족들이 1백50m앞에 침몰하는 배를 보고 발을 굴렀으며 시체가 인양되자 부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난 구조자 가족들의 함성과 희생자가족의 눈물로 얼룩졌다. 한편 인양된 30구의 시체는 가족들이 차례로 인수, 집으로 옮겨 부두에는 8일낮 12시현재 9구의 시체만이 남아있다.

<눈앞에 하선두고>좁은 물목 가해선 불쑥|선수 돌려라 승객 비명

<사고경위>
7일새벽 질자호는 개도를 떠나 기항지인 백야도를 거쳐 상오11시10분쯤 여수앞의 장군도의 좁은 물목에 들어섰다.
이때 길자호는 여수항잔교를 눈앞에 보며 엔진을 껐고 30여명의 승객들이 하선하기위해 갑판위에 나와 있었다. 수출선 삼행호는 이순간 여수교동 부두를 따나 여수철공소쪽으로 원동기등 비품과 냉동용얼음을 실으러 가기위해 이 좁은 물목을 빠져나가던 길이었다.
삼행호는 약 60m남쪽에서 엔진을 끈채 부두로 들어오던 길자호를 발견, 엔진을 급히 끄고 선수를 돌리려 했으나 디젤·엔진이 아니기때문에 그대로 미끄러져 나갔다. 갑판위에 있던 길자호 승객들은 갑자기 나타난 삼행호를 보고 『선수를 돌려라!』하고 아우성쳤으나 꽝하며 60t짜리 삼행호는 길자호의 왼쪽후미를 들이 받았다. 승객들은 충돌의 충격에 대부분이 넘어지거나 엉겁결에 바닷물속에 뛰어들었으며 삽시간에 부두가 빤히 바라보이는 해상은 『사람살리라!』는 비명으로 가득찼다.

<사고현장>
길자호 후미에 30m쯤의 구멍이 나 차가운 물이 배안으로 쏟아져들면서 후미부터 물속에 빠져 들어갔다. 갑판위의 승객들은 다투어 물속에 뛰어 들었으나 그때 선실에 남았던 많은 승객들은 『배가 잠긴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선실을 빠져 나오려고 서로 앞을 다투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선실안에 탔던 승객들이었다.
잠시후 길자호는 마스트만 수면위에 남겼다가 6분뒤 수심 약 10m의 해저로 가라앉았으며 수면엔 텀벙대며 살겠다는 승객들의 허우적거림으로 수라장이 되었다.

<구조작업>
사고가 나자 삼행호 선원 8명과 물속에 뛰어든 길자호 선원 5명은 급한대로 물에 빠진 승객들을 건져내기에 바빴다.
마침 길자호와 같은 잔교를 이용해온 해경 601함(해경여수기지대소속·정장 이성진·43)이 길자호가 입항하는 모습읍 보고 정박할 자리를 비켜주기위해 시동을 걸다가 충돌현장을 목격, 그대로 달려나가 구조작업을 벌였다.
곧 여천군 행정지도선을 비롯, 어선 9척과 해군 703함 및 해경 206함·301함등이 합세, 물에 빠진 승객들을 건져내 구조작업은 빨리 진행되었지만 겨울의 찬 해상에다 충돌때의 충격으로, 실신하거나 다친 사람이 많아 희생자가 많았다.

<염소우리타고 3세여아 생환|두소녀 구해준 아저씨 희생|3남매 껴안은채 어머니 익사>
침몰사고의 북새통에 마스트에 올라가 살아난 사람, 헤엄치는 염소목에 매달려 산 사람등 기적이 있었고 1가족 4식구가 몰사한 참사도 있었다.
박형수씨(47·여천군화양면안정리)는 선장실 뒤쪽에 있는 선실에서 졸고 있다가 꽝소리를 듣고 놀라 깨 밖으로 나와 자신도 모르게 브리지를 타고 마스트 꼭대기로 올라가 물한방울 묻히지않고 살아났다.
혼자서 언니집으로 가던 김동심양(7·화양면원포리)은 충돌소리를 듣고 일어서는 순간 윗문이 꽝 닫혔다. 옆에 누워자던 비슷한 나이의 소녀가 놀라깨며 김양의 손을 잡고 울어대는 순간 옆에있던 한아저씨가 주먹으로 문을 부수고 두 소녀를 간신히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두소녀를 구해준 고마운 아저씨는 물에 잠겨 끝내 솟아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김형준으로만 알려진 세살난 여아는 침몰직후 배에서 바다로 굴러 떨어진 염소우리에 올라가 혼자 표류하다 구조됐다.
부산시영도구봉래동18통5반 정선자씨(32)는 아들·딸셋을 데리고 화양면 친정에 다녀오다 4명 가족이 모두 익사했다.

<삼행호에 과실>두선장구속
사고원인의 조사에 나선 경찰은 현지 해운당국과 합동으로 원인조사를 한결과 삼행호 갑판장 주형두씨(44)가 60m쯤의 거리에서 입항하는 길자호를 발견, 엔진을 껐으나 그대로 나아가 충돌을 일으킨 것은 주씨의 미숙과 과실 및 배의 과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 조사반은 길자호선장 김삼돌씨로부터 삼행호를 발견 갑판장 한광부씨(38)와 같이 호각을 불며 『옆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쳤으나 그대로 달려들어 들이받았다는 진술을 받아 삼행호의 과실에 심증을 굳힌 것이다.
한편 여수경찰서는 8일 길자·삼행호 두선박 충돌사고의 원인을 조사한 결과에 따라 제멋대로 운항, 충돌을 일으킨 삼행호 갑판장 주형두씨(44)와 정원 초과한 길자호 선장 김삼돌씨를 각각 업무상중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했다.

<승선명부 없고 정원초과 일삼아>가해선박 삼행호선 안전수칙도 무시

<문제점>
남영호침몰사건 23일만에 일어난 여수항내 길자호충돌사건은 여전히 승무원들이 선박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관계당국의 선박관리, 승선인원 점검등 감독사무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음을 드러냈다.
첫째, 길자호는 앞서 남영호때와 같이 승선인원의 명단이 작성되지않아 어디서 누가 타고 내렸고 누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특히 노후선박에 정원초과를 일삼은데 문제가 있다. 남영호의 교훈이 그대로 묵살해 버린셈.
경찰측 주장으로는 시발점인 개도에는 경찰관 파출소가 없으며 파출소가 있는 지점의 백야도에서만 이배를 검문했는데 검문당시는 승선인원이 30명 안팎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배가 세포·원포·안정을 거치는 동안 정원 64명보다 많은 93명이 탄것이 밝혀져 여전히 정원초과를 해서 희생자가 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가해선박인 제12 삼행호가 선장이 없는 사이 해운당국에 신고도 없이 갑판장이 운행하다 참사를 빚은 것으로 밝혀져 여수해운당국이 선박승무원의 감시감독을 소홀히 한데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선장이 없는 삼행호는 여수항내가 썰물일때는 초속 6노트의 조류가 흐르며 낚시배들이 많아 평소에도 미행을 해야하는데도 시속 7노트정도의 속력(길자호의 선장 김삼돌씨 주장)으로 항내를 가로 질러 운항한 것으로 보아 안전수칙을 전혀 무시한 것이 드러나 선박관리자가 모두 제멋대로 움직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길자호가 한계선령을 갑절이나 초과한 낡은 배인데도 여객선으로 계속 취항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점이다. 선박관리법으로는 목선은 5년마다 쇠못을 바꿔 안전도를 높여야하며, 선령 20년이 지나면 폐선해야 한다. 부득이 폐선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무판자까지 모두 바꾸는 전면보수를 해야 하나 1932년에 진수한 길자호가 그대로 이를 지켰는지 의문이다. 이배는 지난해 3월31일 선박검사에 응해 합격처분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으나 충돌했을때 처음에는 직경 20cm정도의 구멍이 뚫렸던 것이 물살에 구멍이 커져 침몰을 가속했다는 것으로 보아 안전성이 약했음도 드러냈다. 사고가 나자 여수해운국은 내항에서는 모든 선박에 미속운항을 지시했는데 어째서 남영호의 교훈을 저버렸는가 하는 점에 실무자들의 잘못이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여수항에서는 작년 12월28일에도 똑같은 충돌사고로 고구마 7백가마를 수장한바 있었고 지난 6개월동안의 충돌사고는 4건이나 되었다.
작년 한해 여수항내에 출·입항한 선박은 하루 평균 4백척으로 총 1만1천2백15척이었는데 이 선박에 대한 검사원은 고작 2명밖에 없어 『손이 모자란다』는 구실을 방패로 적당주의적 행정이 굳어 승객의 안전과 선박의 안전을 외면해 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여수=임시취재반】

<9일에 합동위령제>
길자호 침몰사고대책본부는 7일밤 관계관회의를 소집하고 희생자들의 합동위령제를 9일상오 11시 여수시군자동진남관에서 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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