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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제4화 명월관(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기생수련>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나이 14세되던 해였다.
나는 대정권번에 몸을 담고 나이어린 몸으로 우선 공부부터 시작했다.
대정권번은 곧 우리나라 최초의 규약를 만들었다. 최고 우두머리를 1번수라고 불렀고, 주모선배가 여기에 취임했다. 1번수밑에 2번수와 3번수가 있었고 그 다음은 나이와 연조에 따라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정연했다. 흔히 말하는 깡패세계에 의리와 계급관념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기생들 사회에도 이와 못지않은 엄격한 상하구별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서로 부르는 호칭도 꽤 까다로와 한살위면 언니(평양서는 형애)라고 불렀고 두 살위면 형님, 5년 위쯤되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아주머니라는 말은 퍽 재미있는 뜻을 갖고 있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여자는 애를 잉태하기 마련이고 아기가 뱃속에서 10개월간 자라기 때문에 여자란 어찌보면 아이주머니 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주머니가 줄어 아주머니가 되었다는 그때 선배들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무척 재미있고 그럴싸하게 생각된다.
한편 선배들이 후배들을 부를 때는 그냥 기명을 부르면 되었다.
권번에 들어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남의 추천을 받아오는 이가 제일 많았고, 일부는 본인들이 직접 찾아왔다.
좋은 권번에서 조신한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를 배우고 지체높은 양반의 눈에 들기만하면 팔자고치는 판이라 시집가기위해 권번을 찾는 여성도 많았다.
권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회금으로 10원∼20원씩 내야했고 일단 이름을 올려놓으면 매월 50전씩 회비를 꼬박 꼬박 내야했다.
권번에 이름을 올린 기생이라해서 모두 매일 권번에 나와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집에 그냥 있으면서 권번에서 전화오면 부르는 손님에 따라 나갔고 직접 연락을 받고 나가는 경우에는 가는 곳을 꼭 권번에 알려 항상 권번이 기생들의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속해있던 대정권번에서는 대개 20명정도의 기생들이 모여 공부를 했다. 대정권번에 공부시키러나온 선생은 하규일선생님이셨다. 하선생님은 당대의 가무에 정통을 잇는 분으로 대정권번의 학감으로 나오셨던 것이다.
하선생님하고 나하고는 인연이 꽤 깊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지금 정부종합청사 근처에 있던 정락전습소에서 노래와 춤을 배우는데 그때도 하선생이 계셨고, 다동조합시절에도 하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때문이다.
하선생님은 전에 전북 진안군수를 역임한 양반이었다. 그 무렵에는 이왕직아악부에 계셨고 대정권번에는 하선생님외에 아악부악사 11명이 함께 나왔다. 공부하는 시간은 대개 아침 10시정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헤어졌는데 기생들이 많을 때에는 방을 두서너개 터서 넓게 썼다.
노래와 춤은 먼저 이모선생에게서 배우고 여기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만 골라 다시 하선생님에게 추천되었다.
하선생은 주로 춤과 노래를 가르쳤고 가야금은 당시의 거장 명완벽씨가 맡았다.
팔기운이 있음직한 뼈대 굵은 기생들은 주로 거문고를 배웠고, 몸이 갸냘픈 축은 양금을익히고, 가야금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노래는 우선 목이 터야 했는데 노래를 부르는 수창기생이 되려면 담이 크고 침착해야 했다. 대개 노래는 우조 6가지, 계면 6가지, 편 1∼2가지, 춤은 춘향무·장상보연지무·무고·사고무·무산향등을 익히면 어느 정도 기초수업은 끝나는 것이었다.
권번에 이름을 올린 모든 기생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출석제도없어 게으른 축들에게는 편리했으나 후에 명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뭏든 나는 하선생님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으로 하선생님께서는 『이집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가끔 칭찬해 주셨다.
훗날 내가 25살때 대정권번이 조선권번으로 바뀌었을때 내가 취체역을 맡았으니 하선생님의 말씀대로 된셈이기도 하다.
대정권번출신중에 당대의 명기가 많이 배출된 까닭은 학식이 높고 가무에 출중했던 하규일선생님의 덕분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하규일선생님밑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무렵 하루는 어느 손님이 나이어린 나의 이름을 듣고 『향내가 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2∼3년만 있으면 향내가 난다』고 깜찍한 대답을 했다. 손님은 『평양출신은 정말 다르구나』하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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