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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25 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 분초의 다툼(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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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월27일 낮12시 서울에서 기차로 피란 남하하는 이승만대통령 눈에 비친 낙동강연변은 문자그대로, 한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초여름의 훈훈한 바람이 싱싱하게 자란 벼포기위에 너울거리고, 농부들은 어디서 전쟁이 났느냐는듯 바쁘게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1천3백리의 낙동강은 산을 돌고 물을 누비며 예나 다름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수행한 유일한 비서인 황규면씨 말을 빌리면, 이대통령은 차중에서 낙동강연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홀연회개하여 피란을 중단, 대구에 잠시 들른후 기관차머리를 돌려 다시 북상했다는 것이고 프란체스카여사는 영탄조로 오! 아름다운 이강산! 이라고 읊었다는 것이다.

<영천전투가 최대의 위기>
이로부터 한달후 낙동강은 별항의 이은상작사, 박태현작곡, 김천애노래에서 집약표현된 바와같이 피아의 생사를 건 혈전장으로 변했다.
그러면 이제 세부적인 전투상항을 다루기전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낙동강 공방전을 직접 총지휘했던 정일권씨(전총리·54)로부터 전반적인 전세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정일권씨는 낙동강공방전때 유엔군이 한때 한국으로부터 전면철수를 계획했으며 영천회전에서 실패했더라면 낙동강교두보는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8월초순부터 9월중순까지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그들의 허리가 끊겨 괴뢰군이 패퇴할때까지 약 l개월반동안 낙동강연안에서 피아가 사력을 다해 싸운건 다 아는 사실이지요. 이때에 여러가지 에피소드와 아슬아슬했던 이야기가 많지만 나는 그중에서 몇가지만 말하겠읍니다.
우선 낙동강교두보가 여러번 위태로왔지만, 내가 보기에는 9월5일께 괴뢰군 제15사단이 영천에 침투했을때가 제일 위기였던 것 같아요. 지도를 보면 알다시피 여기가 뚫리면 아군의 배후가 찔려 경산·청도가 개방되어 부산까지 내리 닥칠수 있어요. 괴뢰군은 8월공세가 좌절되자 남은 병력을 모조리 낙동강으로 이동시켜 보병 13개사단·기갑 1개사단·기갑 2개여단의 도합 9만8천명으로 소위 9월 총공세를 시작한 거예요. 이곳 저곳에서 아군진지가 돌파되어 그때마다 땜질하는 식으로 메웠지만 영천의 경우는 정말 사태가 급했습니다. 이때 적 15사단 말고 또 다른 후속부대가 뒤따랐다면 아마 아군전선은 결딴이 났을 겁니다. 워커 8군사령관과 구멍뚫린 영천방어진지에 대한 미군의 지원방도를 협의했어요. 워커장군과는 거의 매일 만났고 많을 때에는 하루에 여섯번이나 작전을 협의한 적이 있지요. 그쪽에서 작전지휘를 하던 군단장 유재흥장군(현 국방담당 대통령특별보좌관)이 미군탱크 1개중대(22대)만 지원해 주었으면 해요. 그 뜻을 전했더니 워커사령관이 안된다는 거예요. 언어도 통하지 않는데다가 한국군이 탱크와의 보·전 합동작전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효과가 없을 거라는 겁니다. 나는 처음에는 화를 발끈냈습니다. 전전선의 운명이 지금 영천에 달려있는데 한국군에도 통역장교가 있어 군사술어쯤 간단히 익힐 수 있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정말 눈물을 흘리며 지원을 호소했어요.
결국 워커사령관이 미국탱크 1개소대를 지원해 주기로 했읍니다.
이 무렵에는 미군측에서 낙동강교두보를 아주 포기하고 전면철수하느냐 울산부근의 새방어선으로 더 오므러드느냐는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고갔어요.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도 근심이 대단했구요. 하루는 내게 배속돼있는 8군사 연락장교인 하우즈먼대위(제대·현재주한미군근무)가 워커장군의 비밀지시라면서 이대로 전선이 자꾸 뚫리면 유엔군은 전부 철수할 계획인데, 그렇게 될때에 한국군은 다데려 갈 수 없으니 2, 3개 사단만 미리 선발계획을 세워 두라는 겁니다. 이말을 들으니 등꼴이 오싹합데다. 그길로 대구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이승만대통령께 사실을 보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의 반응은 아주 비장했어요. 대통령은 나보고 워커사령관에게 이렇게 전하라는거예요.

<이대통령 나도 총들겠다>
미국사람은 죄다 나가도 할수 없지만 우리는 이상 더 후퇴할 수 없다. 나도 총들고 병사와 함께 싸우겠으니 국군은 그런 철수계획에 응할 수 없다. 대구로 올라와서 하우즈먼대위에게 이런 대통령의 뜻을 전했더니, 이번에는 그가 펄쩍 뛰어요. 극비사항이고, 그런 계획도 미리 생각해두라는건데 왜 대통령에게 벌써 알렸느냐는 겁니다. 나야 통수계통상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맞섰지요. 이러던중 영천서 적 제15사단을 완전 섬멸해서 이 철수계획은 흐지부지된 거지요. 그리고 낙동강공방전때 애먹었던 것은 통신시설이 미비해서 작명하달과 전투부대 파악이 퍽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경비행기로 직접 전투지구까지 가기도 했고, 포항비행장에서는 적포격으로 하마터면 죽을뻔 했어요. 이 공방전을 통해 가장 감명깊은 것은 국군이 훈련과 장비는 부족했지만 사기는 매우 왕성하여 이것이 교두보 사수의 바탕이 됐다는 점입니다.』 한편 1사단 제12연대장으로 낙동강공방전에 참전했던 김점곤교수(48)는 이 교두보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전략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우선 낙동강교두보에서 45일동안 연일 혈전이 거듭된 것은 피아가 다 이선에서 물러설수 없는 데다가 시간상으로 보아도 서로가 분초가 아까왔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서 적측은 더이상 유엔군의 증원이 오기전에 부산까지 점령해야 하고, 아군측으로서는 그 증원군이 올때까지 버티어야 했으니까요. 유엔군이 낙동강교두보 방어자체에만 전력투구를 못한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동시에 준비해야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인천상륙의 전제는 어디끼지나 부산교두보의 확보에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낙동강전선을 확보해서 적주력을 여기에 얽매어 놔야만 비로소 인천상륙이 가능하며 부산이 함락된다면 본전도 없어지니까요. 적은 낙동강의 전병력을 인천으로 전용할테니까, 도저히 상륙한다해도 인천지역을 지탱할수 없는 거예요. 이렇게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전에 있어 얼핏 보아서는 이율배반적인 것 같은 큰 모험을 한겁니다. 함수관계에 있는 부산과 인천의 양면작전을 둘다 성립시켜야 하는 맥아더와 위커 사이에도 견해차이는 좀 있어요. 후자는 낙동강교두보 확보에 전부를 걸자했고 맥아더는 차원높은 양면작전을 고집했으니까요.
사실 맥아더원수의 머리에는 적남침초부터 이 양면작전의 구상이 요지부동하게 콱 박혀 있었어요. 6월30일에 이미 원수는 우선 북괴군의 남침을 저지한후 인천부근에 상륙, 그 보급로를 절단하고 남북에서 적을 협격 분쇄한다는 작전방침을 전군에 시달했어요. 그리고는 7월4일에 참모장 아먼드소장에게 제1기갑사단으로하여금 인천상륙준비를 하명케했구요.

<맥아더 인천상륙전에 집념>
이 계획은 블루·하트(Blue Hearet)계획이라고 불려 7월22일께 실시하려고 했지요. 이때만해도 원수가 적전력을 퍽 얕잡아 본게 틀림없어요. 맥아더는 미24사단에 이어 25사단을 투입, 한국군 5개사단과 함께 적남침을 금강·소백산맥선에서 저지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7월14일에 인천상륙용으로 온존했던 미제1기갑사단을 동해안와 영일만으로 상륙시키고 블루·하트계획은 일단 폐기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는 상륙전의 집념을 끝내 버리지않고 7월23일에 크로마이트(Chromite)계획을 입안, 본국에서 내원중인 제1해병여단과 제2사단으로 9월중순께 인천·군산·주문진중의 어느 한 곳에 상륙준비를 시켰읍니다.
그러나 호남지방을 우회한 적2개사단이 급진, 하동·진주를 점령하자 부산이 직접 위협받게 되어 다시 크로마이트계획을 연기변경해서 미해병대와 미제2사단도 낙동강교두보 확보에 투입하게 된 거지요. 하지만 원수는 일본에 있는 미7사단을 주력으로 해서 끝내 크로마이트계획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실천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요. 해병대와 미2사단의 증원을 얻은 유엔군은 8월초에 사수선이라고 결정한 낙동강교두보를 구축했어요. 앞서도 말했지만 유엔군으로서는 앞으로 상륙작전을 하려면 이 교두보를 꼭 지켜야해요. 한편 제공권과 탱크의 마력을 잃은 적으로서는 유엔군 증원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기전에 이 교두보를 돌파해야만 승산이 있는거구요. 이래서 낙동강교두보 확보에서 45일동안 피아가 사력을 다해서 연일 격전이 벌어진겁니다.』

<낙동강>이은상 작
①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흐르는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잊지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이 강물 네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오호 낙동강, 오호 낙동강
끊임없이 흐르는 전통의 낙동강
②산들아 들을 누벼 1천3백리
굽이굽이 여흘여흘 이 강위에서
조국을 구하려는 정의의 칼로
반역의 무리들을 무찔렀나니
오호 낙동강, 오호 낙동강
소리치며 흐르는 승리의 낙동강
③두언덕 고을 고을 정든 내고장
불타고 다깨진 쓸쓸한 폐허
돌아오는 아침햇빛 가슴에 안고
나아가 네힘으로 다시 세우라
오호 낙동강, 오호 낙동강
늠실늠실 흐르는 희망의 낙동강

<집필자의 말>전문가와 상담, 본사·지사 총동원해서 전력집중 관계자 입 안열어 어려움도
민족의 증언은 약 l년간 계획과 자료수집등 준비를 갖춘다음 본사 창간5주년 기념의 대사업으로서 연재를 시작했다.
이 계획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만반의 준비와 단단한 각오로 착수했지만, 진행하는 동안 뜻하지 않은 어려움과 애로가 적지않았다.
첫째로 꼭 입을 열어주어야할 요긴한 관계증인들이 증언해 주지않은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고 둘째는 당시의 정세를 가장 잘 알수있는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점이다. 셋째는 관계자들이 20년전의 일이라 겪은 일을 대부분 잊어버렸거나, 또는 때로는 위증을 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럴 때에는 본사에 비치한 80여권의 기본자료를 일일이 체크 대조해야하기 때문에 이중의 손이 가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동안 전국 도처에서의 격려와 더불어 관계자와 독자들이 자진해서 보내준 자료·사진·제보가 많은 도움이 되고 담당자에게 용기를 준데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독자의 소리 모집에서도 응모자가 쇄도한 것을 보고 이제 민족의증언은 문자그대로 전국을 누비는 전민족의 증언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는 6·25동란의 대기록임을 자부한다. 특히 독자의 소리를 통하여 6·25를 겪지못한 청소년과 농민·회사원같은 서민층이 뜻밖에도 민족의 증언에 깊은 관심을 갖고있는 것을 알고, 새삼 막중한 사명감을 느꼈다.
새해에도 민족의 증언을 더욱 객관적으로 충실히 보도하기 위해 종전처럼 여기서 이름은 밝힐수 없지만 사계의 권위있는 4명의 전문상담인과 부단히 상의검토하고 중앙일보 편집국 전체와 각 지방지사를 총동원해서 전력투구할 것을 다짐하며 관계자와 독자들의 계속 성원을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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