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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단과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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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것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성찰이다. 명예와 욕망의 충족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을 발견하는 하나의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적이란 그 태반이 인생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다.』
행복은 이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은 이따금 청부인생을 꿈꾼다. 중국의 실화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지옥에 빠진 한 사나이가 염라대왕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아니면 재생을 시켜주어도 싫다고 말한다.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서 1만정보의 땅과 연못과 곡식과 황금과 착한 아내와 첩을 거느리고 1백살까지 살며 고관의 아들을 두지않으면....』
그러자 염라대왕은 대답했다.
『이 사람아, 그러며 내가 태어나지!』
러시아의 문호 도소토예프스키는 『악령』이란 소설에 바로 그런 몽상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인간이 불행하다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그는 거듭 교훈한다.
『인간에게는 행복이외에 그와 똑같은 불행이 항상 필요하다』-.
중국 소나라의 위대한 문예비평가 김성탄이 옳은 『행복한 한때에 관한 33절』은 몽상가들에겐 허망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 누가 날리고 있던 연줄이 끊어 졌을 때』, 『창문을 열고 왕벌을 쫓아 냈을 때』,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을때』, 『물건값을 깎을 때』, 『차용증서를 불태울때』, 『못된녀석이 죽었을 때』, 『참나무를 톱으로 켜는 소리를 들을때』...,
행복은 참 고답적으로 말하면 관능적인 감수성의 결과이지 결코 쟁탈이나 쟁취할 것은 아니라는 아이러니이다.
프랑스의 작가 카뮈는 그의 문학수첩에서 『행복이란 그 자체가 긴 인내』라고 고백한다. 『불행은 행복위에 서고, 행복은 불행위에 눕는다』는 노자의 생각과도 통한다.
독일의 서정시인 하이네는 차라리 행복을 조소한다. 『행복은 바람난 창부이다. 같은 장소에 다소곳이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결코 행복, 행복하고 초조해하며 애를 태울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심통만 더 할뿐이다. 인생의 교향악은 마음의 가난과 정익과 정신적 만족으로 이루어 질때 위대한 피날레로 끝날 수 있다. 71년은 저마다 이런 행복한 한해로 작곡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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