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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화장』 밑그림 삼아 사랑을 덧그린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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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06면

한국의 감독들이라면 누구나 다소는 조급증에 시달린다. 구로자와 아키라나 이마무라 쇼헤이 등 전통적으로 노감독의 세계가 올곧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감독들은 쉽사리 조로한다. 아니 한국이라는 사회가 영화감독들을 조로시킨다. 그래서 한국 감독들은 마음이 급하다. 하루라도 더 빨리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고 애쓴다.

102번째 영화 메가폰 잡는 임권택 감독

임권택 감독이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경이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 노감독의 영화적 갈증은 도대체 어디에서 그칠 것인가. 그런 질문에 화답하겠다는 듯 임권택 감독은 10월 3일 시작될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102번째 영화의 제작발표회를 갖는다. 김훈 원작의 ‘화장’이 그가 새로 영화화할 작품으로 선택한 소설이다.

임권택이 김훈을 만난다는 것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어 보인다. ‘서편제’에서부터 ‘천년학’에 이르기까지 십수 년의 말년 인생을 함께 했던 이청준 작가가 세상을 달리한 후 임 감독 역시 세월의 한 켠을 접은 듯이 보였다. 이청준의 죽음은 그의 영화인생의 한 장(章)이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세대의 스태프들과 디지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찍었다. 101번째 작품이었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그의 새로운 영화인생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 같은 작품이었지만 그 자신 별로 흡족해 하지 않았다. 예술과 인생이라는 것의 본질을 끝까지 들춰내겠다는, 노 감독의 끈질긴 결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었건만 왠지 그 자신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않아 했다. 이번 김훈과의 만남은 아마도 그가 새로운 정신적 동반자를 찾았음을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번 작품에 평생을 그래 왔듯이 또 한번 혼신의 힘을 쏟아부을 것이다.

‘화장’은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젊고 아름다운 회사 여직원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중년남자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인생의 후반을 살아갈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면 사랑이 사랑이어서만은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한 그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사랑이어야만 결국 상대에 대한 용서는 물론 자신에 대한 구원의 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김훈의 ‘화장’을 임권택은 그렇게 그려내지 않을까. 임권택의 ‘화장’은, 그리고 그 속의 사랑은, 가슴 속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느낌일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지금껏 만든 작품 한편 한편을 복기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편수 때문만이 아니다. 정신적 혜안의 깊이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부산영화제는 개막 훨씬 전인 9월 23일부터 임권택 감독에 대한 대규모 회고전을 치르고 있다. 보존된 필름이란 필름은 모두 찾아내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복원한 5편을 포함해 총 75편이다. ‘만다라’ ‘길소뜸’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태백산맥’ ‘취화선’ 등등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1980년에서 2010년까지의 작품만도 서른 편에 가깝다. 1962년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볼 수 있는 건 진실로 뜻깊은 일이다. 모두들 하나같이 불꽃 같은 작품들이었다. 이 회고전을 후원한 에르메스 코리아는 4일 밤엔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 행사를 열어 감독에게 디렉터스 체어를 선사할 예정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역사 그 자체다. 임 감독은 영화로 거대한 시대의 산을 쌓았다. 그에게 끝없이, 무한한 존경을 표하고 싶은 건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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