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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왜 하느냐고? 글쎄, 내 인생은 알겠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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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27면

피아니스트는 동시대의 경쟁자들뿐 아니라 고인이 된 전설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왼쪽)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음반은 아직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두 사람이 1979년 파리의 루빈스타인 자택에서 만나고 있다.

“그렇게 매일 연습하기 싫으면… 넌 음악 왜 해? 이 직업은 평생 연습하고 살아야 하는 직업인데, 그렇다면 이게 과연 네 적성에 맞는 길일까? 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 아닐까?” 진심 어린 궁금증을 늘어놓는 나에게 그녀는 예의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음… 근데요, 싫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모 정도?(그녀는 호감도를 늘 동그라미, 세모, 엑스로 구분하곤 한다.) 그리고 전 연습시간이 적기는 하지만 남들이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서너 시간에 비례하도록 초집중해 하거든요…. 실은 저도 예전에 한 번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고. 그런데 연습이 죽을 만큼 싫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재밌을 때도 있고! 나머지도 괜찮고.” “나머지? 연주?” “네, 사실 그렇잖아요. 연주라는 게 관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잖아요. 그렇게 치면 우리가 을 입장인 건데 원할 때 원하는 레퍼토리로 연주해, 그런데도 잘하면 존경까지 받아, 이런 을이 세상에 어딨어요? 거기다 제가 재주가 없는 것도 아니니, 일단은 해 보자고 생각을 했죠.”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우문현답

그녀 특유의 낙천적 관점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그 대척점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피아노를 잘 친다고 생각하는 친구 W는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이 무덤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니? 생각해야 될 게 너무 많아…. 첫 음, 그 하모니의 보이싱, 프레이징, 충분히 노래하면서도 잃지 말아야 할 흐름, 페달은 깨끗하지만 건조하지는 않아야 하고, 흥분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 속엔 모멘텀, 관중을 느껴야 하지만 집중을 잃어서는 안 되고, 머리·몸·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그 와중에 여유라니. 이상적인 연주란 실로 불가능해.”

음악가의 기본 행위가 그녀의 말대로든, 그의 말대로든 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이것저것을 검토한 끝에 이 일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형편이 어려워져 피아노를 계속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을 때의 내 고민의 성격은 영 달랐다. 내가 왜 환경 때문에 음악을 그만둬야 하지? 잘하는 데다 엄청 좋아하기까지 하는 걸 내가 왜 못해야 하지? ‘선택’이란 단어가 내 인생과 음악 사이에 애초에 존재했더라면 그건 내 기억이 닿지 않는 어떤 태곳적 순간에 내가 음악에게 선택당한 그 때 뿐이었을 것이다.

내 경험상 음악가들의 십중팔구가 그녀보단 나에 가깝다. 우리 대부분은 시쳇말로 ‘타고난’ 재능을 아주 어려서부터 ‘발견당해’ 이 일을 시작해 그저 이것만이 길인 줄 알고 해 왔다. 우리와 가장 흡사한 직업인 운동선수들에게는 이겨야 한다는 정직하고 단순한 목표라도 있지만 음악가들에게는 그것도 없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보고 음악으로 출세해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음악을 하는 거야?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러는 당신은 왜 매일 밥을 먹는 거냐고 묻겠다. 밥? 그거야 살려고 먹지. 그럼, 당신은 왜 사는가?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왜 하는가?

몇 달 전 기내에서 읽은 한 잡지엔 여전히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중견 음악가 M의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 열광하던 연주자는 아니었는데, 한 음악가이자 인간으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자못 놀라웠다. 그녀는 음악가라는 직업이 그다지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직업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신동으로 출발해 성공가도만 달려온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이 직업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기 쉬운지, 도태되기 쉬운지 그리고 얼마나 무의미할 수 있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에 대해 그녀의 삶이 내놓은 해답은 음악가의 사회적 역할이었다. 내가 음악을 함으로써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기량을 쌓기 위해 자기 스스로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만 결국 그 과정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 관객을, 어린이들을, 노인들과 아픈 이들을,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는 것. 책을 덮고도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감동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게 정말 최후의 답일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 다다음 날 콩쿠르에 출전하는 친구 O가 run-through를 해 보겠다고 해 밤 12시에 D와 함께 학교 소강당에 앉았다. 잘 치지도 못하는 데다 떨려 죽겠고 도대체 왜 지금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O를 강압과 회유 끝에 피아노 앞에 앉혔다. 한 시간여에 달하는 프로그램. 그가 마지막 음을 끝내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D와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너무 좋다…. 좀만 더 쳐 주면 안 돼?” 잘 세팅된 홀도, 잘 조율된 피아노도, 맘먹고 무대에 오른 완벽한 연주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는 그날 느꼈다. 베토벤은 어떻게 곡을 이렇게 썼더란 말인가, 쇼팽은 어쩜 이런 하모니를 썼더란 말인가, 음악은 얼마나 좋던가, 음악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결국 우리 셋은 돌아가며 새벽 2시까지 이 곡 저 곡을 치고 나서야 강당을 나섰다. 아직도 음악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글쎄, 사실은 감히 답하고 싶지 않다. 그 대답은 내 음악과 내 인생이 대신해 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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