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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중<문학평론가>|투명한 관념적 표현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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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설가가 우리에게 얘기해주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얘기하는 일들은 현실다운 외관을 충분히 갖추고 있을 필요가 있다. 소설은 그것이 우리에게 얘기해주고 있는 것을 다른 힘을 빌지 않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일어날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이렇게 말한 미셸·뷔토르이나 뒬라스의 소설들을 읽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새삼 서구의 오늘의 문학과 한국의 문학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세계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여기에 바로 한국적인 문학의 독자적인 풍토가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이라 해서 그냥 만족할 수만은 없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보는 현실 바로 그것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작품 속에서 그러내는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과는 다른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그러내는 현실은 작가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며 또한 그러기에 시각이 문제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지각, 또는 눈을 모든 현실 위에 놓았던 플로베르에서부터 한 주인공의 속에 동정시키던 프루스트, 그리고 또 작가의 눈을 완전히 부정해 보려던 랄렝·로브그리에 등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작가들은 보다 더 깊이 현실에 파고 들어가기 위한 경험을 거듭해왔다. 여기에 비겨 적어도 이 달에 나온 우리네 작품들에서는 거의 모두가 작가의 눈이 현실 위에 놓여 실험을 내려보고 있다.
시골이나 시골사람처럼 작가가 다루는 세계가 단순한 때에는 이런 시각도 좋다. 또 이게 정통적인 수법이기도 하다. 유승휴의『치욕』(현대문학)은 이를테면 전형적인 한국적 소설이다. 우직한 시골을 배경으로 하여 희·비극이 겹친 파토스가 있고 구수 타분한 요 설 적인 표현이 깔려 있고, 그리고 또 거침없이 주인공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작가의 눈이 있다.
이런 작가의 눈이 별로 거슬려 보이지도 않고, 또 작품이 다룬 현실에 대한 실감에도 손상이 안된 것은 작가의 뛰어난 솜씨 때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독자에게 낯익은 이런 한국적인 소설의 판에 꼭 들어 맞아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1인칭이다. 그것이 후반부에서는 완전히 3인칭으로 바뀌어진다. 문제는 왜 인칭이, 따라서 시점이 바뀌어지느냐 하는데 있다. 규정을 바꾸는데는 그것을 고정화시키는 이상으로 필연적인 또는 계산된 까닭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불충분할 때에는 작품의 중량 감은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외촌 동을 배경으로 한 연작의 하나인 박태순의『구멍탄 냄새』(월간중앙)도 묘하게 박태원의 세태소설을 연상시켜준다는 뜻에서 낯설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 박태원의『천변 풍경』이 세태를 그리는데 있었다면 그의 외촌 동 얘기는 종일 구멍탄 냄새와 연기로 뒤덮인 하나의 분위기에 초점이 놓여져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비록 정주댁 살해사건이 중심이 되어 있으나 과연 누가 그녀를 왜 죽였는지, 그녀의 과거가 무엇인지는 벌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하나의 스케치의 디테일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주제까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저 현실의 한 단면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그쳤으며 작자의 눈도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일종의 평면적 리얼리즘은 사실에 집착할수록 그것이 주는 현실감은 오히려 줄어든다.
여기에 오늘을, 그리고 오늘을 사는 인간의 삶을 그릴 때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다. 문학의 세계에 있어서는 현실 그것보다도 현실을 파 속하는 작가의 시각과 이것을 통하여 찾아낸 현실감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박태순의 또 다른 작품『단씨의 형제들』 (문학과 지성)과 비교해본다면『구멍탄 냄새』에서 애써 낡은(?) 평면적 리얼리즘의 수법을 쓴 까닭이 납득이 가기도 한다.
6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어딘가 조잡했다.『구멍탄 냄새』는 삶을 방관자처럼 곁눈질로 살짝 더듬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삶과 정면에서 씨름하듯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의 시각도 감정과 관념의 프리즘을 거쳐서 현실을 보고 있다.
따라서 그가 그러낸 현실도 어지러운 현실만큼이나 어수선하기만 하다. 그것은 젊은 작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결점 때문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가장 크게는『거짓을 꾸미고 사는 상황하에선 서로 약간의 예절을 차려두어야 한다』는 세상에 대한 부정으로 이끌어 나가는 관념적 도식성에 탈이 있는 것 같다.
까다로운 관념적인 표현들을 그대로 내뿜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그것들을 다루는 작가의 눈은 어디까지나 투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을 보는 눈도 현실 그 자체가 가파를 수록에 투명해져야만 한다는, 여기서 작품 속의 현실감은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작가의 눈은 고정되어야 한다거나 어느 도식을 미리 상정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설에 있어서는 가설이나 명제의 설정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도식 성이나 정형성의 위험 속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한 시튜에이션에 알 맞는 인간형을 구상한다는 것은 창작 플랜 과정에 있어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시튜에이션에 올려놓은 주인공의 삶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의 생명과 논리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 만일에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작품이 그려낸 현실이 그럴싸하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럴싸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를테면 소설이 가져야할 현실성은 죽어들기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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