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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제자는 필자>|<제3화>인술 개화(4)|정구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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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의사와 무당>
「헤르텔」교수 밑에서 2년 동안의 부수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1922년이었다.
그때 나는 국가 의사 고사에 합격해서 의사 면허를 받았고 곧 안동병원의 부원장 겸 외과 과장으로 발령 받았다. 그때가 27살 때였다. 원래 우리 나라 의료 제도는 1894년(고종 31년)의 갑오개혁으로 내무·외무·도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 무의 8아문을 두었을 때 내무 아문에 속해있었는데 1895년에 내무 아문에 위생 국이 생겨 의료 업무를 두어 왔었다.
위생 국에는 위생과·의무 과·보건과가 있었고 전염 예방과 우두를 놓는 일, 소독·검역·식물·음수·의약·가축의 도살·묘지와 그 밖의 위생 사무를 모두 다루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이 종두였다.
그때만 해도 우두를 맞으면『뿔이 난다』『소가 된다』하여 이를 피하고 대신 홍역을 앓은 사람의 부스럼 딱지를 떼어 콧구멍에 넣어 면역을 하는 욧 법이 잦아 위생 당국이 이를 계몽하는데 골치를 앓던 때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서는 병원보다 종두 원이 먼저 생긴 이유이었다. 위생을 내무 아문에서 다루는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치에 간섭하는 일본인들이『주민이 미개해서 힘으로 해야겠다』고 나서 위생 업무를 1906년에 소위 경찰 총감 부에서 뺏어간 것이다.
의사의 종류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어 그 밑에 한지 의사와 입 치 영업자가 있었다. 그 아래 의 생이 있었으며 의 생에는 무기 면허 자와 5년의 유기 면허자가 시험을 통해 자격을 얻었다.
이밖에 공의 제도 촉탁의 제도가 있었다. 공의는 지금의 보건소와 꼭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해 간 안동 병원은 원장·부원장과 내과 의사 조수들, 간호원들이었다.
맨 처음 주어진 의료 공무는 ①전염병 예방 ②지방병 조사 ③종두 실시 ④학교의 위생 ⑤공장의 위생 ⑥예기·창기·작부 등의 건강 진단 ⑦행려 병자 및 빈민 환자 진료 ⑧이 밖의 공중 위생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방역 업무는 1915년 6월에 구체적으로 지시가 내려졌었다.
그때의 법정 전염병은 지금과 같이 ⓛ콜레라 ②파라티푸스 ③성홍열 ④적리 ⑤두창 ⑥디프테리아 ⑦장티푸스 ⑧발진티푸스 ⑨페스트였다.
내가 병원에 도착해보니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때만 해도 주민들은 한의에 집착, 양의를 믿지 않는 것과 오히려 샤먼 의술에 홀려 병이 나면 약을 먹는 것 보다 무당·복 술을 찾는 것이 앞서는 일이었다.
병원 시설도 또한 주사기와 간단한 수술 도구가 있을 뿐 형편없이 내가 배운 수술 기술을 발휘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석 달쯤 있어보니 이 고장에는 폐결핵이 두드러지게 많았고 이밖에 피부병·학질·성병이 극심하고 나병조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는 폐병 하면 곧「사형선고」라고 하던 때여서 진찰로 폐결핵이 나타나도 본인에게는 말못하고 귓속말로 보호자에게 알려 주곤 했다.
한번은 폐결핵 환자를 진찰하고 전과 같이 부모에게 일러서 보냈더니 그 이튿날 그 청년이 험한 얼굴로 찾아와 내가 왜 폐결핵이냐고 따져 아주 혼난 일이 있었다.
또 한번은 다리가 부러진 40을 넘은 환자가 있었다. 한방 치료만 받다가 곪아 할 수 없이 들것에 실려 온 것이었다.
당장에 수술을 해야할 판이었다. 간호원에게 수술 준비를 시키고 잠시 후 살펴보니 환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환자는 수술한다는 말에 놀라 내가 잠깐 자리를 빈 사이에 달아난 것이었다.
이 1920년대쯤에는 신문에는 가끔 환자 도주의 기사가 나곤 했다. 웬만한 병원에서는 수술대에 올라갔던 환자가 번쩍거리는 메스를 보고 죽이는 줄 알고 도망가는 일이 한 달에 5, 6차례씩이나 있었다.
이래서 의사들이 해야할 일은 환자의 신임을 얻는 것이었다.
초기에 부산에 있던 제 생 병원의 일본인 한 의사는「몰핀」으로 신임을 얻었던 일이 있었다. 나도 그「몰핀」효과를 노려 치료한 경험이 있었다.
한번은 안동 권씨 문중의 80난 늙은이가 구토·설사로 다 죽게 되어 나를 찾아왔다.
아무리 진찰해 보아도 다른 증세는 없는 환자였다. 우선「몰핀」을 한대 놓아 진통시킨 뒤 크게 치료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간호원을 부르고 처방을 하고 일부러 야단법석을 부렸다. 심리 효과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80 노인은 진통제의 덕으로 한잠 푹 자고 나더니 설사·구토가 가라앉았다.
맥도 모르는 자손들은 내가 명의라고 칭찬해 추었다. 이 권씨 집안은 그 다음에는 집안에 병이 나면 안동 병원을 찾아와 단골이 되었는데 이 집에서 현대 의술을 받아들이자 인근에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때 병원장은 50이 넘은 일본 사람이었다. 환자들이 목욕을 하지 않아 2, 3인이 같이 입원한 병실에서는 냄새가 나서 항상『더럽다』는 말을 되뇌어 나는 얼굴이 화끈 닳아 오르곤 했다.
겨울에는 특히 환자의 몸이 더러워 간호원들은 우선 상처나 환부 주위를 씻어 주는 것이 첫 번째 치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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