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로하니 "핵 협상 즉각 나설 용의" … 미국에 화끈한 화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68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아래)이 24일(현지시간)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욕 AP=뉴시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68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 한마디로 그는 이스라엘 보수진영의 공세를 ‘무장해제’시켰다. 로하니의 전임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조작’이라고 부정해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방의 공분을 샀다. ‘외교의 달인(diplomatic sheikh)’이란 별명에 걸맞게 그는 서방이 원하는 모범답안을 정확히 짚었다.

 이날 그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핵무기는 이란의 안보·국방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구체적인 결과 도출을 목표로 시한을 정한 협상에 즉각 임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공언했다. 앞선 기조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대화 노력을 지지한다”며 외교적 해결을 촉구한 데 대해 화끈하게 화답한 것이다. 다만 그는 미국 대통령과 36년 만의 조우는 거절했다.

 애초 두 사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주최한 이날 오찬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칠 것으로 기대됐다. 공식적인 만남은 아니더라도 서로 악수하고 “다음에 만나자”란 덕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장면이란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점심자리에 술이 제공됐다는 이유로 로하니는 피했다. 아직은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이 이란 국민에게 쉽게 수긍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오는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및 독일이 참가하는 이른바 ‘P5+1’회담에서 무함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과 만날 예정이어서 대화를 통한 이란 핵 문제 해결의 물꼬는 트인 셈이다. 더욱이 최근 이란의 태도 변화는 단지 온건파인 로하니 대통령이 아니라 이란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강력한 제재로 이란 경제가 벼랑 끝에 몰리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서방과의 대화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 보수진영에선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이란 핵 개발을 주도해온 장본인이 하메네이이기 때문이다. 로하니 역시 끊임없이 서방을 향해 핵 위협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서방과 대화를 하는 척 시간을 벌면서 북한처럼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 아니냐는 얘기다.

 오바마 역시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이날 기조연설에서 이란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면서도 이란에 진정성 있는 선조치를 촉구했다. 최소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 시설을 공개하고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하는 성의를 보이라는 주문이다. 이란이 이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앞으로 양국 외무장관 회담 등에서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란이 국제사회가 원하는 수준의 비핵화 의지를 실천에 옮긴다면 국제사회의 시선은 북한으로 향할 공산이 크다.

 미국은 북한이 진정성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란이 이 같은 미국의 봉쇄조치를 먼저 풀고 대화를 시작한다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다음 달 1일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