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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증언|적 치하의 3개월|「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토목기사로 가장한 네 기자는 서울서 왜관 다리를 보수하러 간다고 남하를 계속한다. 일행은 일부러 동네「인민위」에 들러 숙식도 제공받고 검문하는 내무서원에 꼬투리를 잡아 도리어 호통도 친다. 뱃심과 기지로 점철된 기자들의 적중횡단의 마지막 부분을 이번에는 장명덕씨(당시 합동통신기자·현사업·45)로부터 들어보기로 하겠다. 『수안보에 이르니 괴뢰군 부상병들이 우글거려요. 대구 전방 다부동에서 지금 거의 한달 째 싸우고 있는데 폭격이 심해 전선을 뚫을 수 없다는 겁니다. 비행기 때문에 녹았다면서 사기가 퍽 죽어 있어요.
또 문경내무서이 들렀더니 지독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자가 자기는 대구시 내무자 근무발령을 받고 내려왔는데 대구가 점령이 안 돼 한 달이나 여기서 묵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만 보아도 북괴가 얼마나 남침을 사전에 치밀하게 짰는가를 알 수 있지요.
군수에서 검문받을때 아슬아슬한 이야기는 전회에서 박홍서씨가 말했지만 참, 사람의 심리란 묘하더군요. 산 밑에서 오라고해서 박홍서씨와 김진학씨 둘만이 내려가 나와 AP의 채기자는 그대로 남았는데 30분이 돼도 안 돌아와요.

<나만 살자는 얌체본능도>그자들과 우리편 두 기자가 뭐라고 하는게 멀리서 보여요. 맘이 조마조마한데 자꾸 혼자라도 도망치자 싶은 생각이 치밀어요. 다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나만이라도 살아보자. 생의 본능이겠지요. 내가 생각해도 참 얌체지만, 어쨌든 들먹들먹했어요. 하지만 내가 도망치면 산밑의 두 동료는 꼼짝없이 잡혀 처단된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참았는데 결국 넷 다 무사하게 됐지오.
왜관 바로 앞에서 l0여명의 내무서원을 만나 이들과 동행, 되돌아오다 헤어져 다시 콩타작하던 영감님 댁으로 갔읍니다. 그 댁에서 자는데 영감님이 자꾸 국군편이 아니냐고 물어요.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니까 바른대로 안대면 재워주지 않겠다는 거예요.
할수 없이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더니 아주 반가와 하면서 자기 아들도 국군에 가 있대요. 영감님은 밤에 만약 놈들이 오면 마루에 나와 큰기침을 할 터이니 뒷문으로 해서 산으로 도망가라고 해요. 새벽 2시쯤 됐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영감님 기침소리가 들려요. 우리는 곧 뒷문으로 빠져나가 뒷산 소나무 밑에 한참 숨어있으니까 영감님이 찾아왔어요. 괴뢰군 탈주병 두 명이 와서 옷을 달래서 주어 보냈다고 하더군요. 아침을 먹고 영감님이 3시간쯤 길을 직접 안내해 주어요.
우리는 하도 고마와서 돈 3만원을 모아 주었습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꽤 큰 도로가 있는데 차가 많이 왔다갔다 하데요. 우리는 저것이 틀림없이 미군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산 맞은편 쪽을 바라다보니까 괴뢰군 깃발같은 것이 보여 거기를 뚫고 내려갈 계힉을 짰습니다. 우선 일행의 단장격인 박홍서씨가 혼자 정찰하러 갔지요.

<포복으로 미군기지 접근>그분이 가보니까 괴뢰군기처럼 보인 것은 부락 피란민들이 산에와서 이불을 펼쳐놓은 것이 그렇게 보였다는 거예요. 신호를 보내와서 나머지 셋이 갔더니 피란민들이 소를 잡아 삶아 먹으면서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기에 맛있게 먹었죠.
산꼭대기로 기어올라 내려다보니 멀리 미군 진지 같은 것이 보이는데 여기서 거기까지는 논과 들판 이예요. 우리는 종군기자 훈련 때 익힌 포복술대로 그 들판을 기기 시작했읍니다. 정신없이 한참 기어가는데 「누구야? 손들어. 안 들면 쏜다」는 소리가 나요. 고개를 들어보니 국군과 미군 정찰대입디다. 나는 서울 출발할 때 배낭 끈 속에 감추어 놓았던 종군기자휘장을 내보이고 AP의 채기자는 미군한테 달려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OK, OK」하데요.
이래서 우리 넷은 20여일만에 적지를 탈출했지요.』
다음에는 문산 전투에 참가했다가 낙오되어 서울에 잠복한 후 적중을 돌파한 당시의 국군 현역장교 정엄수소위(현육군대령·육본근무·41)의 탈출담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내가 소속했던 제5사단 15연대(연대장 최영훙대령)는 지리산에서 공비를 토벌하다가 6·25를 만나 급히 문산지구에 투입됐습니다. 28일에 서울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우리는 금촌에서 듣고 후퇴를 시작해 수색까지는 편제를 유지했지만, 이미 김포와 한강이 적 수중에 들어가 퇴로가 완전히 막혔기 때문에 할 수 없이「각개약진」으로 도하하기로 하고 부대를 해체했지요.

<미군포로 보고 참전 알아>그래서 나는 30일에 민가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서울에 잠입하는데 벌써 소위 자위대라는게 조직되어 검문을 하더군요. 이 핑계 저 핑계로 검문을 피해 을지로4가에 있는 동경인인 조칫과를 찾아가 숨으며 탈출계획을 짰습니다. 시일을 끌면 끌수록 탈출은 힘들다는 생각에서 조씨한테 약간의 노자를 얻어 가지고 7월6일인가 행상차림으로 길을 떠났어요. 한강은 별로 힘 안들이고 건넜는데 노량진과 영등포 사이에서 자위대놈들의 불심검문에 걸렸어요. 머리며 발 같은 것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국군 낙오병이 아니냐는 거예요. 가족들이 먼저 피란길을 떠났는데 나도 뒤따르는 참이라고 변명해서 가까스로 첫 위기는 벗어났읍니다.
이날 저녁에 수원에 도착해 보니, 시내에는 적「탱크」가 50여대나 집결해 있어요. 통신수단만 있다면, 저것을 미군에 연락해 폭격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디다. 어떤 민가의 헛간에서 잠을 자고 계속 남하하는데 도중에서 괴뢰군 20명이 미군포로 1백여명을 압송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이제 미국군도 참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새 힘이 솟더군요. 길옆 농가에 들러 밥을 얻어먹고 나오다 보니까 국군이 후퇴하다 버리고 간 듯한 농구화가 있어요. 마침 신발이 닳아서 그것과 갈아 신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손들어」하는 고합소리가 나요.

<머리보고 국군이라고 심문>돌아다보니 5명의 괴뢰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요. 손을 드니까 놈들이 다가와서 뒷산의 방공호 속으로 끌고 갑디다. 그 호 속에는 6명의 괴뢰군관과 전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곧 심문을 시작하데요. 우선 고향이 어디냐고 묻길래 천안읍「매곡동」 이라고 댔읍니다.
가까운 곳이어야 의심을 덜 받겠기에 무턱대고 그렇게 댄것인데, 나도 천안지리를 전혀 모르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다그쳐 묻기에 서울서 장사하다가 이렇게 전쟁이 나서 노모만 계시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고 꾸며댔지요. 그랬더니,「일주일만 있으면 부산까지「해방」시킬텐데 이 위험한 전선을 넘으려는 것을 보니 수상한 놈이다」라면서 솔직이 말하라고 뺨을 때리며 발로 걷어차요. 그리고는 지금까지 위장남하 하는 국군장교·경관·공무원 등을 많이 잡아서 총살했는데 네 머리모양이나 상판을 보니 국군장교나 학찰이 틀림없다는 거예요. 솔직히 자백하면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총살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자들은 위장남하 하는 사람들만 색출 처단하는 괴뢰군특수부대인 것 같아요. 고르고 골라서 재수없게 걸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장사꾼이라고 주장했읍니다.

<괴뢰군 다발총 쏘며 추격>놈들은 이제 국군은 다 망했는데 무엇 때문에 고집하느냐고 달래기도 해요. 그래도 버티니까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총살한다」고 합디다. 그리고는 천안에 내려가서 전해줄 터이니 노모한테 유언이나 남기라는 거예요. 나는「불효자식으로서 용서를 빈다」는 내용의 유서를 몇마디 했어요. 그러자 괴뢰군관 한 놈이 부하에게 총살준비를 시키더니 나를 끌고 산등성이로 올라가요.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이때입니다. 어느새 날아왔는지「제트기」세대가 저공으로 돌면서 폭격과 기총소사를 시작했어요. 이틈에 모두 납작 엎드렸는데 이때 위치가 나는 산등에 올라섰고, 놈들은 서너발짝 뒤였어요.
나는 이 순간은 하늘이 준 기회라 생각하고 일어나 냅다 뛰었습니다. 약15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뛰어 7백m쯤 떨어진 건너편 산 숲 속에 엎드렸어요. 이때는「제트」기는 이미 사라졌는데, 놈들이 호각을 불면서 나를 찾는게 멀리 보여요. 근처의 의심스러운 숲이나 덩굴 속에 대고 다발총을 마구 갈겨대구요.
나는 꼼짝 않고 그대로 옆드려 있다가 워낙 피로했기 때문에 그만 깜빡 잠이 들었읍니다.깨보니 한밤중이에요. 이제부터는 밤에만 행동하기로 결심하고, 걸음을 재촉해서 평택을 거쳐 천안가까이 가니까 날이 새더군요. 천안에 들어서니 괴뢰군의「탱크」와 보급부대가 이동하고 있는게 보여요. 포 소리도 들리고요. 그래서 전선이 가깝다고 생각하고 천안남쪽 5km쯤 되는 부락으로 찾아 들어갔지요.
좀 부유해 보이는 집을 골라 찾아가 주인에게 기탄없이 내 신분을 대고 남하길을 가리켜달라고 부탁했읍니다.

<손수건 흔들어 사격 멈추게>주인은 친절하게 밥도 해주고 국도변은 위험하니 공주 쪽으로 가라고 해요. 그리고는 삽과 농민복을 줄 테니 논에 물대러 가는 농부처럼 가장하면서 가라고 일러주어요. 어찌나 고마운지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하고 물러났읍니다.
이렇게 해서 그 후부터는 별로 검문에도 걸리지도 않고 며칠을 걸어 공주북쪽 20리쯤 가니까, 미군 정찰대가 장갑차를 가지고 와서 지뢰를 묻고 있는게 보여요.
하도 기뻐서 무조건 달려 접근했더니 위협사격을 가해와요. 삽도 든 채니까, 공산「게릴라」로 안 모양이지요. 빨리 손수건을 꺼내 흔들었더니 사격을 멈추데요.
다가가서 서투른 영어로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말을 무엇으로 증명하느냐면서 의심해요. 참 안타깝더군요. 그래서 당신 부대에 데려다가 국군에 조회를 해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차에 태워 공주 본대로 데려가 줍디다. 거기서 내 연대인 15연대가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로 가보았더니 연대병력이 그동안 전투로 많이 상해 1개대대 정도밖에 안 되더군요.살아있는 전우들과 얼싸안고 울었읍니다.』
▲정정=본 연재 11월24일자 1판의 부제「적치하의3개월」번호「17」은「16」의 잘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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