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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제2화 무성영화시대(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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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5면

<초창기 활동사진>
우리 나라에서 처음 활동사진이 만들어진 것은 1919년 김도산씨가 이끄는 「신극좌」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라고 기록되어있다. 연극 중간중간에 무대실연이 곤란한 부분만 「필름」에 담는데 불과했다.
이 『의리적 구투』는 그해 10월27일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는데 「영화의 날」도 이날을 기념해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리랑』이 만들어지기 7년 전의 일이었다. 그후 1923년 최초의 극영화로 만들어진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는 조선총독부가 자금을 댄 저축계몽영화였다.
이 영화에 주연했던 이월화씨는 바로 우리 나라 여자영화배우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서울창성동 기생집 출신으로 본명은 이정숙이었다.
그는 소녀시절부터 관철동에 있던 우미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변사를 하겠다며 흉내를 내곤하던 재주가 많은 말괄량이었다.
17살에 「여명극단」의 배우로 등장해서 꽤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토월회의 2회 공연인 『부활』에서는 「카추샤」역을 맡아 뇌쇄적인 육체와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었다.
그는 『월하의 맹서』 이후 『해의 비곡』 등에 출연했으나 그 후에는 영화에 나오지 않고 「스캔들」만 뿌렸는데 나중에는 중국인과 같이 일본 「모지」(문사)에서 살다 음독자살 했다는 소문만 들렸다.
1924년에는 우리 나라 처음의 영화사인 조선 「키네마」주식회사가 부산에서 일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첫 작품으로 일인이 감독한 『해의 비곡』을 만들었고 이어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을 내놓았다.
이 『운영전』에는 후일 한국영화계에 찬란하게 두각을 나타낸 천재 나운규 선생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했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맡은 역은 운영아가씨의 가마를 메고 가는 교군꾼이라는 단역에 불과했다.
그후 윤백남씨는 서울로 올라와 직접 윤백남「프로덕션」을 차렸다. 첫 작품으로 만든 것이 『심청전』이었으나 별로 재미는 보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는 이경손씨가 감독을 맡고 나운규씨가 심봉사역을 맡았었다.
『심청전』을 감독한 이경손씨는 이어 『장한몽』을 만들었다. 이 영화가 바로 당시 장안 영화「팬」들의 심금을 울려준 비극물, 일명 『이수일과 심순애』였다.
이 영화로 『수일과 순애』의 노래까지 유행했었는데 『순애야! 김중배의 금반지가 그리도 좋더란 말이냐?』하면서 목청을 돋우던 변사의 해설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순애역은 김정숙씨가 맡았고 수일역은 주삼손씨가 맡았었다.
주삼손씨는 그후 나하고도 여러 번 출연한 「오오자와」(대택)라고 하는 미남의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주삼손씨가 「장한몽』을 반쯤 촬영하다말고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주연배우가 도망을 갔으니 촬영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도 없었으므로 불가분 수일역을 대신 뽑아야했다.
여기에 등장한 사람이 조선일보기자로 있던 심훈씨였다.
그는 당시 드물게 보는 미남으로 그후 『상록수』라는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장한몽』은 꽤 인기를 끌었지만 수일이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져 관객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희비극을 낳기도 했다.
『아리랑』을 제작한 조선 「키네마」사가 세워진 것은 이 무렵이었다. 본정통에서 「요도야」(정옥)라는 모자점의 주인인 「요도·도라조」(정호장)가 세운 것이었다.
첫 작품인 『용중조』는 이규설씨가 감독을 맡았고 주연을 한 나운규씨는 천재적인 연기였다고 절찬을 받았다. 또 이 영화에는 복혜숙씨가 처음으로 출연을 했었다.
나보다 훨씬 선배인 복혜숙씨는 본명이 복「마리아」였다. 서울 장안에서 이름 높은 복 목사의 딸로 일본유학까지 하고 돌아왔는데 연극에 아주 미쳐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연극을 못하게 하느라고 안수기도까지 했으나 그래도 집을 뛰쳐나올 만큼 그의 연극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었다. 『용중조』로 재미를 본 「요도」가 마음으로 제작한 것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나라 잃은 이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 『아리랑』은 아리랑민요의 애절한 「멜러디」와 함께 전국으로 퍼져갔고 이로 인한 나운규 선생과 나의 인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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