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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적치하의 3개월(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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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적중 횡단>(4)
북괴가 남한점령을 용의주도하게 사전에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것은 남침 후의 소위 그들 언론정책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정 하에서 언론자유를 교묘히 이용, 침투를 계속하여 오제도 검사(현 번호·53)의 말을 빌면 당시 절반을 훨씬 넘는 언론인들이 남노당 내지 용공분자, 혹은 그들의 영향하에 놓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수립과 함께 이들은 많이 축출됐지만 6·25 당시까지도 아직 적색분자들의 뿌리는 언론계 안에 남아있었다.
북괴군이 6월28일에 서울을 점령하자, 그들은 재빨리 통신과 신문발행을 서둘렀다.

<북괴기간요원이 신문발행>
해방 후 모신문 주필을 하다가 월북한 오기영이란 자가 이끄는 7∼8명의 「기간요원」이 서울에 와서 현 서울신문사자리에서 소위 「인민보」를, 그리고 대한공륜사 자리에서 소위 「해방일보」를 각각 7월4일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다.
4「페이지」의 조간형식으로 낸 이 두 신문은 전자가 한자와 한글 병용인데 반하여 후자는 순 한글로서 내용은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괴뢰 선전뿐이었다.
신문발행은 9월10일까지 계속되다가 폭격이 심하고 전세가 기울자 중단됐다.
통신사 또한 평양서 온 그들 기간요원들이 당시의 합동·공립·한국의 세 통신사를 통합, 소위 「조선중앙통신」을 만들고 1일1회 정도의 통신을 발행했다. 통신이나 신문원고는 서울시인민위원회에서 엄격한 검열을 실시했다.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잔류했던 언론인들 일부는 그들 강요에 못 이겨 보신책으로 마지못해 출사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하에 잠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에 소개되는 바와 같이 기자특유의 뱃심과 기지로 적중을 돌파, 우군전선에 도달한 경우도 있다.
▲박홍서씨(당시 연합신문정치부기자·현 한국편집인협회사무국장·55)
『6월28일 아침에 지금의 대한공론사에 있는 사에 나갔더니 벌써 소위 「자치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해 놨어요. 정문에서 전에 시청을 나가던 김모 기자를 만났는데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야, 너 잘 만났다. 이새끼, 인민공화국 일좀 시켜야겠다」는 거예요. 까만 후배기자인데 참 기가 막히더군요. 들어가보니까 괴뢰군 환영「포스터」와 표어를 그리는 등 야단이예요. 정치부 차장인 최인규씨가 있기에 눈짓을 해서 둘이 함께 빠져나왔지요. 남하해보자고 걸어서 마포까지 가니까 목선으로 사람들을 실어날라요.

<후배기자가 "야 너 잘 만났다">
일단 배까지 탔는데 최인규씨는 암만해도 가족에 한마디 알리고 와야겠다해서 그만 내려버렸읍니다. 그래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만나 또 마포까지 갔더니 이미 교통이 끊어졌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남하를 못하고 서울서 한달 동안 잠복생활을 했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인규씨는 후에 다시 가족까지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가 충남예산에서 괴뢰군에 잡혀 총살당했다는군요.
궁정동 누님집과 동생집으로 숨어다니며 지내는데 7월25일에 신당동집으로 합동통신에 있던 김진학씨가 찾아왔어요.
김기자와는 전에 종군기자 1기생으로 육사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고, 평소에도 숙친한 사이였지요. 김기자는 「의용군」에 붙들려갔다가 탈출해왔다면서 서울을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해요. 나도 마침 탈출계획을 짜고 있는 터라, 잘됐다 싶어 둘이서 계획을 세웠지요. 그래서 우리 둘과 역시 합동통신의 종군기자였던 장명덕씨, AP의 채 기자, 이렇게 넷이 함께 탈출 남하하기로 했읍니다.
당시 한전토목기사로 있던 내 사촌동생 박영서가 내무서에 강제 동원되어 한강철교보수공사에 나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동생 신분증을 보고, 그대로 위조하고 출장명령서를 네통 훔쳐오라고 했더니, 3일만에 가져옵데다. 신분증에 찍힌 인장을 그대로 그려서 연건동골목에 있는 도장포에 가서 내무서서 왔다고 하면서 도장을 새겼지요. 이래서 넷의 신분증을 만들고 출장명령서의 목적지는 왜관으로, 용무는 그곳 다리보수라고 기입했읍니다.

<내무서원에 되려 호통치고>
29일 새벽에 우리 넷은 허술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을 걸머지고 탈출의 길에 올랐지요. 광나루에서 내무서원에 출장명령서를 보였더니 두말 않고 강을 건너주더군요. 무사히 강을 건넌 우리 일행은 광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충주로 향했지요.
충주에는 내 숙부가 계셨지만 일부러 피했지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탄로 날 위험이 있으니까.
나는 세 친구에게 내가 책임자로 모든 것을 맡아서 검문이나 심문에 대답하고, 그들과 수작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읍니다.
나는 세 사람에게 이제 인민위에 들어가 용건을 말하고 숙식을 부탁해 볼터이니 만약 30분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면 내빼라고 말하고는 충북중원군신인면 위원회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위원장이란 자를 만나 용건을 이야기했더니 순순히 응해주데요.
숙소도 제일 집이 좋은 전 면장댁을 지정해 주어, 저녁도 푸짐하게 먹고 잠자리에 들었지요. 그런데 자다가 새벽 4시쯤 변소에 갔는데 미군기가 저공으로 날며 금시 폭탄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아 세 사람을 깨워, 남하길을 재촉했지요. 충주를 그냥 스쳐 수안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도 인민위를 찾아 신인면에서와 같이 행세했지요. 성광관이란 온천여관에 안내를 받아 들어가보니까 괴뢰군 부상병과 장교들이 우글거려요.
문경 조령구도를 따라 계속 걷는데 이미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 신발을 벗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어떤 부락앞에서 7명의 내무서원으로부터 검문을 받아 아슬아슬했어요. 「어디로 가는 사람들이냐」고 묻기에 신분증을 보여주었더니 세 사람 것을 모두 거둬 가지고 자세히 훑어보면서 「이것 인찌기(엉터리) 아니냐?」고 되물어요. 나는 여기서 말꼬리를 잡았지요. 「뭐, 어째. 동무 내무서 들어온지 얼마나 돼. 「인찌기」가 뭐야. 내무서원이 일본말을 써서 되나」하고 을러댔지요, 그랬더니 잘못됐다고 사과하면서 신분증을 돌려 주더군요.

<일행 4명 자위대원이 미행>
문경에 들어가서도 내무서를 찾아 신분증과 출장명령서를 제시하고 숙식을 제공받았어요. 자고 나서 집주인에게 밀가루 한되씩을 얻어가지고 산길을 택해 걸음을 계속했읍니다.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까, 웬 사람이 우리 일행을 계속 뒤따르고 있어요. 좀 불안하더군요. 가다가 주막집이 있어 좀 쉬는데 그자가 따라 왔기에 이편에서 먼저 「동무, 무엇하는 사람이요」하고 물으니까 「자위대원인데 동무들이 수상해서 뒤를 따르는 중이다」라는 거예요. 신분증을 보여주니까 아무 말 않고 물러서더군요.
경북점촌에 들어서니까, 괴뢰군이 집결해있어 전선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요. 길가에서 괴뢰군장교들한테 몇 번 검문을 받았지만, 무사히 통과하면서 가다가 주막서 물어보니 전투가 심해서 이 길로는 왜관으로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길을 다시 되돌아와서 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낙동강 상류를 건넜습니다. 민가에 자다가 내무서원의 검문을 받았지만, 한 시간쯤 승강이하다 또 모면했지요. 군위에서 산밑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나서 돌아다보았더니 자위대원 두 놈이 개를 쏴 죽이면서 오라고해요. 가니까 한 놈은 심문을 하고 다른 한 놈은 부락으로 가더니 괴뢰군 장교를 데리고 와요. 신분증·출장명령서를 다 보여주었더니 「오면서 파괴된 다리를 조사한 기록서류를 내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조사하는대로 군동무편에 상부에 보냈다」고 꾸며댔지요. 그런데 그만 장명덕씨 서류가 말썽이 났어요. 장 기자 신분증에 고향이 함경남도 원산으로 돼있는데 아마 놈들이 그간에 행정구역을 개편해서 그때는 강원북도로 된 모양이예요.
괴뢰군 장교가 「원산이 무슨 도인줄 아오?」하면서 지금은 함남이 아니고 강원북도라면서 의심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지금 서울 내무서 서무과에는 사람손이 모자라 남한사람들을 많이 쓰고있는데 그들이 도경을 잘 모르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라고 핑계를 댔지요.

<군관이 교양시켜달라 자청>
그러면서 가만히 보니까 괴뢰장교가 바삐 뛰어나오느라고 그랬는지 군모도 안쓰고 웃저고리 단추도 채우지 않은 채 복장이 말이 아니예요. 여기서 또 꼬투리를 잡았읍니다.
「군관동무, 복장이 그게 뭐요? 정장도 않고 이렇게 취조를 하면 인민이 동무 같은 군관에 어찌 호감을 갖겠소. 군관답게 옷차림을 해야 할게 아니오.」 이렇게 대들었더니 그 자는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동무들이 유식한 것 같으니, 오늘 밤 같이 자면서 교양을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해요. 「우리들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고 딱 거절해서 두 시간에 걸친 이 승강이는 끝이 났습니다. 하마터면 여기서 걸릴뻔 했지요.
다시 산을 넘어 인민위에 들르니 괴뢰군만 있어요. 민가를 지정 받아 얻어 가지고 온 밀가루 떡을 만들어 배낭에 넣고 잠을 잤어요. 밀가루 떡은 내일 가다가 「산중식량」으로 쓰려는 거지요.
아침 10시쯤 출발해서 왜관가는 길을 물으니 원길은 위험하니 산을 넘어 가라고 합데다. 산을 넘어 내려가니까 노인영감부부가 콩타작을 하고있어요.
길을 물으니 친절히 가르쳐주어 들판 논둑길을 걸어가는데 10여명의 내무서원들이 몰려와요.
어디 가느냐고 물어서 왜관다리 보수하러 간다고 했더니 「이 동무들 정신이 나갔군」하면서 저 산너머에 미군 「탱크」가 있다고 해요. 속으로는 참 반갑더군요. 그들은 지금은 위험하니 자신들과 같이 군위로 돌아가 기다리다가 나중에 다시 가라고 해요. 싫다고도 할 수 없어 이들과 함께 돌아오는데 한 부락에 오니까, 저녁을 먹고 가자는 거예요. 우리는 발이 부르터 동부들처럼 걸을 수 없으니 먼저 천천히 가겠다고 사양하고는 그 김로 줄달음 치다 시피해서 먼저 콩타작을 하던 노인네 집으로 향했읍니다.』
※알림=6·25 때 괴뢰의용군에 강제로 끌려나갔다가 살아온 이인희씨(현재 대구시 북구 태평로에서 「구인당」 시계점 경영·38)가 당시 생사를 함께 한 윤영섭씨(당시 구 온양거주)의 거처를 찾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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