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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 모델을 꼭 찾으라지만 … 닮고 싶은 인물이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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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경희대와 중앙일보의 공동 인성지수 조사에서 중학생들의 41.8%가 길에서 돈을 주워도 주인을 찾아주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학생들은 “나도 잃어버리면 못 찾는데 왜 찾아줘야 하느냐”는 답변부터 “주운 사람이 임자” “누가 주워도 갖게 될 돈”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은 연출된 상황임. [강정현 기자]

경희대 교수 7명과 본지 기자들로 구성된 특별취재팀은 지난 6월부터 석 달 동안 서울·경기지역 중학생·교사·학부모 119명을 심층 인터뷰 했다. 이들이 처한 인성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취재팀은 이를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내러티브(narrative·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4교시 체육, 협동 퍼포먼스 시간. 세 사람이 하나의 자세를 만들어야 한다.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두 사람이 가운데 선 사람의 손을 잡고 양쪽으로 기울어지며 부채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 자세는 한 사람이 기마자세를 하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허벅지에 올라 서로 손을 잡고 버티는 것. 인호네 조는 첫 번째 자세는 두 번, 두 번째 자세는 네 번 성공했다. 응원이 대단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거나 하이파이브를 했다.

체육만 신나 … 다른 수업 땐 다들 딴짓

 인호는 다른 수업은 흥미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체육 시간만큼은 좋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 좋았다. 여럿이 팀을 이루는 것도 신났다. 눈빛만으로도 통했고, 누군가 실수하면 손뼉을 치며 ‘괜찮아, 괜찮아’를 연호해 줬다. 운동장에서 친구들은 하나였다.

 교실로 들어가면 달라졌다. ‘일진’이 활약하는 점심시간, 욕설이 난무하는 쉬는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수업 시간에도 교실은 하나가 아니었다. 선생님 말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엎드려서 잠을 자는 친구, 학원 숙제를 하는 친구, 몰래 스마트폰을 틀어놓고 ‘야동’을 보는 친구도 있다. 선생님이 판서를 하는 사이 친구들이 두 손을 치켜들고 플래시 몹을 할 때도 있다. 인호는 손톱을 깨물다가 노트를 펼쳤다. ‘엄마, 나는 공부 체질이 아닌 것 같아’. 인호는 수업시간에 편지를 쓰곤 한다. 10년 뒤 엄마에게 보낼 편지….

 5, 6 교시는 이동수업. 우르르 5층 기술실로 몰려갔다. 기술 과목 중간고사는 조별로 스톱모션 영상을 제작하는 수행평가였다. “이번에는 네 명이 한 조입니다. 서로 도와서 멋진 영상을 만들어 보세요.” 선생님은 번호를 부르며 무작위로 조를 편성했다. 그때마다 환호가 터져나왔다.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도 있었다. 인호 조에 한 친구가 들어가자 친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쟤 또 버스 탄다. 또 무임승차야.” 인호는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두세 명은 놀고먹겠구나. 뭐, 하는 수 없지. 설득할 수도 없고 설득당할 애들도 아니고.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10번부터 15번까지 남으라고 하자, 또 난리가 났다. “학원에 늦으면 큰일 나요!” 친구들은 청소를 하는 것보다 학원에 늦는 걸 더 싫어한다. 선생님이 상벌점 카드에 기록해 준다고 하자,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집에 들렀다 갈까. 인호는 망설이다가 그냥 학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난해 강원도로 전학 간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말로만 듣던 세족식 모습이었다. 친구는 아빠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호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우리 아빠 발이 어떻게 생겼더라?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마다 물놀이를 갔었지만 아빠 발 모양은 생각나지 않았다. 엄마 눈동자는? 누나 손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다. 인호는 스마트폰으로 자기 얼굴을 찍었다. 그리고 눈과 코·입·귀를 하나하나 확대해 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인호네는 네 식구다. 49세 아빠와 43세 엄마는 맞벌이, 세 살 터울 누나는 고등학생이다. 인호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아빠가 동사무소로 발령이 나고 누나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교육비가 문제였다. 아빠 월급으로는 학원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커피 매니어였던 엄마가 커피집을 차렸다. 식구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인호는 말수가 줄어들었고 누나는 엄마와 말다툼이 심해졌다. 사회복지 업무를 맡은 뒤로 아빠는 늘 피곤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인호는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섣불리 나섰다간 나도 … 왕따 눈감아

 학원 강의실은 조명이 너무 강했다. 실험실 같아서 눈이 따가웠다. 쉬는 시간, 짝꿍이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 내가 쏜다’. 짝꿍이 현금지급기 앞에서 돈을 주웠다는 거였다. 인호도 돈을 주워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께 갖다 드렸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해 봄 선생님이 “만원짜리 잃어버린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했을 때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손을 드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친구가 정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남이 잘못하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했다. 무서운 선생님에겐 꼼짝 못하지만 순한 선생님은 골탕을 먹였다. 급식시간에 일진 아이들이 새치기를 하면 꼼짝 못하면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무시했다. 인호도 다르지 않았다. 섣불리 나섰다간 왕따로 몰리기 때문이다. 엄마도 신신당부했다. “친구 다 소용없어. 괜히 나서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중2병? 우리 얘길 안 들어주니 그렇지

 여기저기서 ‘중2병’이 큰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인호가 보기엔 별것 아니다. 하소연할 데가 없고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어서다. 누구도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혼자 살아온 거야.” 국어 선생님은 요즘 학생들을 ‘괴물’이라고 한다. 집, 학교, 학원, 집. 아스팔트, 콘크리트, 책, 컴퓨터, 스마트폰…. 학생은 ‘죽은 것들’과 사는 괴물이라는 거다. 맞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인호는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어깨가 축 처진다. 자신이 없어진다. 학교에서는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서 공감하고 배려하면서 타인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TV특강에서 어떤 분이 ‘여러분 나이 때는 롤 모델을 가져야 미래가 열린다’라고 말했지만 인호는 닮고 싶은 인물이 없다.

 ‘10년 뒤 내 나이 스물다섯이겠네. 엄마, 고맙고 미안해. 하지만 10년 뒤 나를 상상할 수가 없어’.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인호는 너덜더널해진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볼펜으로 편지지를 박박 긁어대기 시작했다. 편지지가 새카매졌다. 인호는 침대에 벌렁 누워 스마트폰을 켰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엄마였다. 어제 듣던 쇳소리 그대로였다. “너, 또 게임이지? 내가 다 누굴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줄 알아?”

◆특별취재팀=성시윤·윤석만·이한길·김혜미·이서준 기자
◆경희대 연구팀=정진영(정치학)·김중백(사회학)·김병찬(교육행정)·성열관(교육과정)·지은림(교육평가)·이문재(현대문학)·김진해(국어학) 교수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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