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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고 녹슬고 담뱃재 묻고 … 억대 미술품들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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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16일 오후 고층빌딩이 빽빽이 밀집된 서울 테헤란로. IBK캐피탈 본점이 입주한 L&B타워 앞 조형물 옆에서 남성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층빌딩 미니어처를 비스듬하게 세워놓은 모양의 조형물에는 검은 담뱃재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이 조형물은 유럽에도 널리 알려진 박은선(48) 작가의 작품이다. 가격이 1억1400만원에 이르지만 관리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100여m 떨어진 대우아이빌 빌딩 앞 조형물은 바로 옆에 설치된 발레파킹 부스의 간판과 맞닿아 있었다. 황동석에 거울처럼 반짝이는 스테인리스를 입힌 이 조형물의 일부는 간판에 찍혀 훼손된 모습이었다. 이 빌딩 관리소장은 “이 빌딩은 공동소유라서 건물주가 조형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발레파킹 부스는 따로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도심 속 미술관’을 표방하며 대형빌딩 앞에 세워진 미술 조형물의 관리가 엉망이다. 본지는 지난달부터 최근까지 서울 테헤란로·청계천·여의도에 있는 67개 대형건물의 건축물 미술작품을 살펴봤다. 깨지거나 녹이 스는 등 관리 상태가 부실하거나 가로수 등에 가려져 감상이 불가능한 곳이 19곳(28%)이었다. 6곳(9%)은 흡연 장소 바로 옆이었다. 33곳(49%)은 작품 설명이 없었다.

 테헤란로 현대타워 앞 조형물은 앞에서 보면 유려한 곡선미가 돋보였다. 하지만 뒤편에 제설 작업에 대비한 모래주머니를 숨기는 용도로 이용되고 있었다. 작품을 받치는 석대(石臺)는 일부가 훼손된 상태다. 1980년대에 설치된 무교동 효령빌딩 앞 조각상은 옆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함께 놓여 있다.

 대형건물 앞 미술작품들은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세워졌다. 건물 용적률을 높이는 대신 시민에게 예술을 즐길 공간을 제공하라는 취지로 95년 의무화됐다. 연면적 1만㎡ 이상의 건축물은 건축비용의 0.7% 이상을 미술작품 설치에 써야 한다. 95년부터 최근까지 전국에 1만3588개가 설치됐다. 설치비용만 총 9456억1700만원으로 한 곳당 평균 6959만원이 들었다. 설치미술가 임옥상 작가는 “최근 들어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작품이 그저 ‘가져다 놓은 상태’에 불과하다”며 “대부분의 건물주가 ‘예술작품’이라기보다 ‘애물단지’로 치부한다”고 지적했다. 시민들도 이에 대해 문제점을 느끼고 있다. 청계천에서 만난 이현택(40·회사원)씨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생뚱맞은 조형물도 있다”며 “관리도 엉망이라 예술작품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작품에 대한 관리 책임이 의무화돼 있지 않은 점은 관리 소홀을 부추기고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관리가 소홀해도 건물주 등에 대해 책임을 묻는 규정은 없다. 작품이 훼손되면 지자체가 건축주에게 원상회복 조치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으나 강제수단은 명시돼 있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원상회복 의무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물리는 방안을 앞으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건물주들도 할 말이 있다. 건축 승인을 받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설치까지는 했지만 관리 책임마저 떠맡는 건 과도하다고 항변한다. 서울 강남 샹제리제센터 관계자는 “미술조형물 설치를 강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건물주가 자율적으로 설치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지난해부터 미술작품을 설치하는 대신 비용의 70%를 문화예술기금으로 내는 제도가 생겼지만 실적은 신통치 않다. 최근까지 대상 건물 262곳 중 16곳(6%)만 이 제도를 활용했다. 건물주들이 돈을 내기보다 작품을 소유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 유석연(도시공학) 교수는 “설치 장소부터 관리 주체까지 명시된 마스터플랜을 마련해야 한다”며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활용해 공공미술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반면 건물 앞 조형물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앞 22m 크기의 ‘해머링 맨’이나 테헤란로 포스코빌딩 앞 ‘아마벨’은 거리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 잡았다. 서울대 조경진(환경대학원) 교수는 “건물주가 미술품을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작품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이정봉 기자·최규진 인턴기자(중앙대 신방과)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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