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측천무후’ 꿈꾼 장칭 vs ‘독 오른 여자’ 치려는 예젠잉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1호 29면

예젠잉과 네룽쩐은 1949년 10월 신중국 선포를 전후해 베이징시장을 역임했다. 1979년 1월 28일 네룽쩐(왼쪽 첫째)과 예젠잉(왼쪽 셋째). 가운데는 역시 베이징시장을 지낸 펑쩐(彭眞). [사진 김명호]

장칭은 사경을 헤매는 마오쩌둥을 뒤로 했다. 다자이(大寨)에 도착한 날부터 농민들과 함께 사슴을 희롱하고 토끼를 쫓았다. 해가 지면 달빛에 취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인류의 영원한 화제인 여인통치[女人掌權]에 농민들은 입을 헤 벌렸다. 익히 아는 얘기였지만 한(漢)대의 여치(呂雉)와 당(唐)조의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얽힌 일화는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0>

베이징에서 따라온 일류 연예인과 작가들도 『고대의 걸출했던 정치가 무측천』 『法家人物 呂后)』 같은 책을 나눠주며 장단을 맞췄다.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도 여성 통치자가 등장할 때가 됐다”는 것과 그게 그거였다.

인민일보와 북경일보에 장칭의 활동이 1면을 차지했다. “중공 중앙 정치국위원 장칭 동지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을 대표해 인민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당시 전국의 언론기관은 4인방이 장악하고 있었다.

병상의 마오쩌둥은 장칭과 달랐다. 반년 사이에 전우 저우언라이·주더·장원톈을 잃고, 탕산(唐山)대지진까지 겪은 절세의 노(老) 혁명가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자신을 말라 비틀어진 버드나무에 비유하며 처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툭 하면 남북조 시대 시인 유신(庾信)의 ‘고수부(枯樹賦)’의 한 구절을 우물거렸다. “흔들리는 모습, 살 뜻이 다했다. 강가에 서 있는 모습 서글프다. 나무도 이와 같거늘 사람이 어찌 견딜 수 있으랴.”

후계자 시절, 마오쩌둥과 부총리 리센녠(李先念·오른쪽)의 회동에 배석한 왕훙원. 1973년 가을.

마오쩌둥의 병실을 지키던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머리가 복잡했다. 장춘차오는 마오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의사들에게 병세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종적을 감춰버렸다. 후계자였던 왕훙원은 베이하이(北海)공원과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사냥과 낚시로 소일하며 마오의 사후에 대비했다. 자신의 근거지 상하이와의 통화도 빈번했다. 상하이에는 4인방의 지시만 기다리는 무장병력 2만이 있었다.

베이징 교외 시산(西山)에 칩거 중인 예젠잉은 입이 탔다. 답답하기는 개국 10원수 중 한 사람인 네룽쩐도 마찬가지였다. 예젠잉이 피서지 시산에 있다는 말을 듣자 더위를 핑계로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관 시절부터 생사를 함께한 노 전우였다.

예젠잉은 젊은 시절부터 지하공작에 익숙했다. 네룽쩐의 방문을 받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라디오 볼륨을 크게 하고 수도꼭지란 수도꼭지는 모두 틀어놓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했다.

네룽쩐이 먼저 예젠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것들 때문에 정말 큰일이다. 주석 옆에 붙어있으니 방법이 없다.” 예젠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도 저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참고 기다리자.” 경극의 반주가 방안에 울려 펴졌다. 예젠잉은 네룽쩐을 안심시켰다. “덩샤오핑은 쫓겨나고 우리도 제거 대상에 이름이 올랐다. 지금은 저것들이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지만 왕훙원이나 장춘차오는 조조가 아니고 주석은 한나라 황제가 아니다. 주석이 세상을 떠나면 장칭이 난동을 부릴 테니 두고 봐라. 독이 오른 여자는 처리하기가 쉽다. 셰익스피어를 많이 읽은 여자들이 못됐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원수의 ‘시산예화(西山夜話)’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다.

9월 5일, 마오쩌둥의 병세가 악화됐다. 예젠잉은 당 부주석 자격으로 장칭에게 귀경을 독촉했다. 장칭은 서두르지 않았다. 밤새도록 창 밖만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걷히자 귀경길에 올랐다.

장칭은 냉정했다. 사신이 남편 곁에 어른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의료진과 훌쩍거리는 간호사들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질질 짜지 마라. 꼴도 보기 싫다. 당장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방에서 나가라.”

장칭은 마오쩌둥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계속 문질렀다. 가끔 소리를 지르며 화도 냈다. 훗날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 마오를 괴롭혔다고 장칭을 비난했다. 아직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장칭은 누가 뭐래도 마오의 부인이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9월 8일 새벽, 장칭은 신화사 인쇄창을 찾아갔다. 공원들에게 모과(文冠果)를 한 개씩 선물했다. 중국인들은 문관과(文官果)라고도 불렀다. 그 덕에 왕훙원·장춘차오·야오원위안 등 문관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라며 몰매를 맞았다.

오후가 되자 번갈아가며 마오쩌둥의 병실 문을 지키던 정치국원들이 도열했다. 한 사람씩 들어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예젠잉의 차례가 왔다.

수십 년간 추종했던 영수와의 영원한 이별, 예젠잉은 만감이 교차했다. 1980년 봄, 당시를 회상했다. “가늘게 뜬 두 눈은 뭔가 새로운 지시를 내리려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에서 나온 예젠잉을 간호사가 황급히 따라 나왔다. “주석이 부릅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