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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원히 잊지 못할 어른
▲창덕궁 김(명길)상궁(77)담=내가 열세살 때 순종황후(윤비)를 모시러 창덕궁에 들어갔을 때 영친왕은 아홉살난 어린 태자였습니다. 본래 체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열살 때에는 아주 귀여운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꽃이 만발한 비원에서 태자는 분홍빛 관사에 연두빛 안을 받친 보장에 태사신을 신고 이리 뛰고 저리 뛰시며 노셨지요. 여남은 살 짜리 새앙각시(새앙머리를 땋은 어린 궁녀)들이 마마의 유일한 동무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군대놀이를 좋아하시어서 새앙각시들은 막대기를 총으로 쓰게 하고 전하는 대나무로 만든 큰칼을 어깨에 메고 새앙각시들과 노셨는데 대장노릇은 언제나 전하가 하셨지요. 철이 없는 새앙각사들이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저질러도 꾸짖는 일이 통 없었고 잠자리를 보살펴 주는 유모에게 이따금『누가 무엇을 잘못했으니 주의를 시켜주오』라고 이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때 전하는 한문과 한글을 배우셨는데 나이에 비해 너무도 숙성하시어서 아침이면 우리들 상궁이나 내인들을 보고 꼭『잘들 잤소?』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전하가 일본으로 떠나시던 날은 12월, 아주 추운 때였습니다. 이등이가 창덕궁으로 들어오더니 전하가 그 동안 입고 계시던 한국옷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히고는 순종께 문안을 드리러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등이가 순종께『잘 모시고 가겠사오니 안심하옵소서』라고 여쭙자 순종께서는『원로에 잘가라』는 당부를 하시는데 그때 뵈오니 신관이 벌개지시더군요.
순종황제를 뵈옵고 나온 태자는 눈물을 흘리시면서『잘들 있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대로 이등이를 따라 가셨는데 눈물한방울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처음 영친왕의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이등박문은 고종황제와 엄비마마께 방학 때에는 해마다 한번씩 꼭 귀국하시도록 하겠다고 하여 겨우 윤허(승낙)를 얻었는데 그후 5년 동안 한번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영친왕의 어머님 엄비는 아드님을 그리워만 하다가 그만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전하는 결국 어마마마의 임종도 못보고 장례에만 참석하러 오셨다가 1주일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후 고종이 승하하시고 전하는 그 다음해 일본에서 이본궁 방자여왕에게 장가를 드셨지요. 당시 궁중에서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여자는 윤비마마와 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하의 혼례준비도 할 겸 윤비마마의 인사말씀을 일본 황후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동경에 도착하자 곧장 영친왕의「도리이사까」어용저로 갔더니 미리 기다리고 계시던 전하께서는 반가이 맞아 주시며『모두 안녕하시냐』고 물으시고,『원로에 고단할테니 어서 숙소로 돌아가 쉬라』고 하셨습니다. 벌써 50여년전의 일이건만 그때의 왕전하의 인자하신 모습은 지금도 역력하게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엄주명씨(73)담(영친왕의 외종 사촌)=까마득한 옛 일이 되고 말았다. 그때 영친왕 일행의 인솔자는 물론 이등박문이었고, 수행원은 이윤용(궁내부 대신), 송병준(상공부대신), 조동윤(동궁시종무관장), 고희경(동궁대부), 엄주일(시종), 김흥선(시종무관)이었는데 나도 4명의 학우와 함께 그중에 끼어 있었다.
인천에서 탄 배가 이틀만에「시모노세끼」에 닿아 그 곳에서 1박하고 경도를 거쳐 동경으로 가「시바」이궁에서 황태자와 4명과 함께 묵게 되었다.
얼마 뒤에「조거판」에 어용저를 마련, 그곳에서 이학박사「사꾸라이」한테 일본어와 이과·지리 등을 배웠다.
그후 한일합병이 되자 어용어를 찾아온 사내 총독은『전하께서는 일본황족의 예에 따라 군인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하여 영친왕과 나는 함께 유년학교에 입학, 다시 사관학교로 진학하였는데 전혀 본의가 아니었지만 왕조를 잃은 왕자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오직 공부에만 열중해서 학적은 줄곧 우등이었고 특히 영어와 수학에 능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훈련과 강행군을 하더라도 고되단 말 한 마디 없이 견뎌내는 강인한 그 정신력에는 오직 감탄할 뿐이었다.
언젠가「미시마」별장에 가서 연못가에서 놀 때 영친왕은 이런 글귀를 써서 보였다.
「선천하지우이우, 후천하지악이악」

<모름지기 천하의 근심은 남에 앞서서 하고, 즐거움은 남이 즐긴 뒤에 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올 때 부왕 고종황제가 제왕학을 위하여 일부러 친히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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