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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일)-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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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들의 전하 ▲관 무사씨 담=이찌가야(시곡) 의 사관학교에서 전하와 나는 영어의 클라스·메이트(동급반) 가 되는 광영을 가졌었다. 층층대로 된 교실의 맨 앞줄 책상 자리가 지정되어서 전하는 오른편, 나는 왼편이었다. 전하는 아무렇지도 않으셨으나 나는 깜짝 놀라서 긴장하였다.
그후 긴장도 풀리고 교관을 기다리는 짧은 동안 때때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느 겨울의 추운날, 전하의 두 귀가 동상으로 새빨갛게 부어있는 것을 보고 『전하, 귀가 아프십니까』라고 했더니『귀는 아무렇지도 않으나 교련 때 마룻바닥이 찬 것이 곤란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영어 선생인 구로까와(흑천) 교관이 여덟팔자 수염을 좌우로 가르면서 교실로 들어오면 일동이 기립하여 경례를 한다. 어느 날『경성은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어보는데 아무도 대답하지를 못 하였다.
교관은 돌연 『전하!』하고 지명을 했다. 모든 생도가『저분이 대체 무엇이라고 말할까?』하고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왕 전하를 바라보았는데 전하는 천연한 태도로 일어서서 명확하게 서울이라고 대답하여 역시 이왕 전하는 다르다고 모두들 탄복하였다.
▲천전 훈씨 담= 이왕근씨라고 하는 것보다 '전하' 라고 하는 것이 50년 전의 옛일이 잘 생각나므로 전하라고 씁니다.
전하는 사관후보생으로서 제7중대에 배속되었을 때, 나는 구대장 이었습니다. 시종 무관은 김응선 소좌로, 어렸을 때부터의 학우인 조대호도 같은 구대에 배속되어 휴일 등에는 함께 모시고 놀았읍니다.
전하의 일상생활은 실로 모범적이어서 규칙적으로 잘 공부를 하셨고 특히 기억력이 강하셔서 답안에는 교정과 일자일구 틀리지 않는 것이 많았읍니다.
방과후의 교실에서는 후보생들이 흔히 낮잠을 자는데, 전하는 한번도 조는 일이 없고 항상 자세를 똑바로 가지고 계셔서 교관들도 모두 탄복하였읍니다.
금상폐하가 입퇴 자식 때문에 경도로 출발하시던 날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전송을 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2중교 부근에 도열하여 있었읍니다.
그대 이왕 전하가 커다란 동화대수장의 부장을 가슴에 달고 대열 속에 계신 것을 보고 나는<한국이 독립한 나라였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고 혼자서 동정을 하였읍니다.
▲회피연삼씨 담= 내가 처음으로 이왕 전하를 뵈온 것은 중앙유년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였다.
고요한 아침, 사람하나 없는 넓은 교정에서 조그만 가방을 한쪽 팔에 끼고 유유히 걸어오시는 전하의 늠름한 영자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항상 북해도를 위시한 지방으로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오랫동안 전하를 뵈올 기회가 없었는데 종전 직전 (1943년쯤) 내가 북만 하르빈 사령부에 있을 때 전하는 항공부대를 시찰하기 위하여 하르빈에 오셔서 반가이 만나 뵈었다.
그리하여 전하를 중심으로 동기생 수명이 하루 저녁 놀게되었는데 장소는 하르빈 일만 회관으로 우선 문안을 드린 후 전하를 에워싸고 축배를 들었다. 그리하여 전하가 유럽을 여행하셨을 때의 이야기 등 화제가 풍부하여 시간가는 줄을 몰랐는데 그 자리에는 일만 회관의 미녀들이 많이 나와서 시중을 들고 술을 따랐는데 그 중의 하나가 특히 전하의 마음에 드신 듯 자꾸 술잔을 주시며 『고향이 어디냐?』『이름이 무엇이냐?』 등을 친히 물으시며 자못 만족하신 모양이었다.
그때 누구였던가. 『전하, 동경에 돌아가서 이 모양을 비 전하께 말씀해도 좋습니까?』라고 하니 이왕 전하는『아내야, 아니야』하시면서 손을 내어 저으시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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