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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여성|한국정치학회월례회 정요섭씨 발표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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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규방 속에서만 살고 사고해왔던 우리 나라 여성들이 그들의 의식범위를 사회와 민족의 차원으로까지 넓히게된 것은 일제에 대한 뼈아픈 투쟁을 통해서였다. 30일 숙명여대 정경대학에서 열린 제18회 한국정치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정요섭(숙대·정치학)교수는 『3·1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여성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발표에서 3·1운동 당시의 여성들의 활동이 3·1운동 이후의 신여성, 여권신장운동, 여성해방운동으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일 합병이 강요된 1910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은 일본의 수탈·동화정책에 대한 민족유대의식이 싹튼 시기였다. 즉 그것은 국민 서로 서로가 감정·문화·이해·운명에 있어 공동체임을 자각한 거족적인 감정이었다. 따라서 3·1운동은 소수의 친일분자만이 제외된 민족전체의 총궐기였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도 처음으로 인간적·민족적인 자각을 보이게된다.
3월1일을 계기로 계속 번진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주축을 이룬 것은 여학생과 여교사들이었다. 일경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은 여성의 수는 4백71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여학생과 여교사가 2백18명(46%)이었다. 또 남성들은 3·1운동 초기에는 지식층이 앞장섰으나 그후 계속되는 운동에서는 농민이 주동이 된 반면 여성의 경우는 시종 나이 어린 지식층이 운동을 이끌어갔다.
체포된 4백71명의 나이를 보면 25세미만이 3백11명(66%), 문자해독이상의 교육을 반은 여성은 2백83명(60%), 기독교신자가 2백74명(58%)으로 나타나있다. 한편 1919년10월에 열린 장로교총회의 발표에는 일경에 의해 감금된 여신도가 5백31명(남자는 2천l백25명)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3·1운동에서의 여성지식인과 기독교신자의 활약이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별적인 활약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역시 유관순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회장「김마리아」로 볼 수 있다. 유관순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악형과 영양실조로 죽음을 당했으나 끝끝내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3·1운동에 참가한 남녀를 통틀어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였다.
한편 정신여고에 근거지를 두고 비밀히 일하던 애국부인회가 대구에서 발각, 회장 「김마리아」를 고문했으나 그들이 돕던 독립투사들의 비밀을 지킨 채 죽음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애국부인회 상해대표는 세계각국부인회로「조선인의 참혹상」이라는 글을 보냈는데 훌륭한 문장과 조국애·기개는 놀라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특히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불어넣었던 「애국기생」의 활동도 상당한 것이었다.
일명 사상기생으로 불리던 애국기생의 수는 서울에만도 8백여명, 기방은 독립활동을 추진하는 비밀장소였다. 일인 천섭료는「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이런 요정을「불온한 장소」라고 비난하고 『이런 불온한 장소가 남아있는 한 겉으로의 탄압만으로 식민정책은 성공할리 없다』는 당시 일본의 의견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재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동아부인상회 등 여성단체들이 3·1운동을 계기로 조직되어 아낌없이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미 상원에 보고된 3·1운동보고서를 보면 일관 청이 한국여성의 운동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고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자의 옷을 벗긴 채 두들기고 발로차고 채찍으로 때리며 욕을 보인다.
담뱃불·인두로 살을 태우고 남녀를 한방에 가뜩 넣어 사지를 펴고 눕거나 앉지 못하게 하는 고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에도 한국여성의 애국열은 계속 팽창, 파리 평화회의대교파견자금을 모금할 때는 한국여성의 금붙이·노리개·화장품은 전부 등원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그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민족의식의 발로였으며, 이 운동을 계기로 한국여성은 관습을 버리고 좀더 새로운 교육을 받고자 유학을 떠났으며, 신여성지도자와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영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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