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뿜 엔터테인먼트의 권력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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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주철환
JTBC 대PD

A는 한때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인데 요즘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B는 특정 장르에서 지금 최고 인기를 누리는 가수다. A의 고향에서 큰 쇼가 열렸는데 주최 측은 출연 순서를 정하며 고민에 빠졌다. 쇼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순서에 누구를 무대에 세울 것인가. 지역이 배출한 왕년의 톱스타냐, 지금 정상에 서 있는 젊은 아이돌이냐. 논의 끝에 B를 마지막 출연자로 정하고 구성안을 짰다.

 염려한 대로 소란이 벌어졌다. 당일 A측에서 강력하게 항의해 온 것이다. 내가 누군데 새파랗게 어린 가수 바로 앞에 노래를 불러야 하느냐. 고향에서 이렇게 대우해도 되는 거냐. 이럴 거면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순서를 조정했다.

 B가 등장하자 무대는 후끈했고 객석은 달아올랐다. 앙코르가 이어졌고 쇼는 당연히 길어졌다. 드디어 마지막 가수인 A가 등장했다. 객석의 반응은 B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들했다. 시간이 늦어진지라 지역 사람들은 귀가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A가 두 번째 노래를 부르는 도중 관객의 절반가량이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당황한 건 주최 측이 아니라 당사자였다.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인생무상, 아니 정확하게는 인기무상을 절절히 느꼈을 것이다.

 무대와 달리 객석에선 반응을 억지로 연기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관객은 정직하다기보다 솔직한 존재다. 그러니 연예인은 각오해야 한다. 지금 환호하는 팬들은 실상 언젠가 돌아설 예비 ‘배신자들’이다. A에게 벌어진 현실을 나중에라도 전해들었다면 B는 유하 시인이 쓴 ‘오징어’를 메모장에 적어두는 게 좋을 듯싶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비슷한 얘기는 방송가 주변에 널려 있다. 예전엔 ‘10대가수 가요제’라는 게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가수왕을 발표한다. 어느 해인가 이변이 일어났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가수왕이 될 거라 예측된 가수가 아니라 그해 데뷔한 신인이 가수왕으로 호명된 거다. 꽃다발과 꽃가루 가득한 화면에 지난해 가수왕의 모습은 없었다. 애꿎은 매니저에게 화를 내며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게 후일담이다.

 연예계가 세상사의 복사판은 아니지만 축소판 정도는 된다. 그 판을 통해 처신을 가다듬는다면 나쁘지 않을 터이다. ‘개그콘서트’는 일주일간 쌓인 영혼의 먼지를 닦아내 주는 고마운 프로다. 시대의 유연성을 가늠하는 거울이자 나침반 역할을 한다. 여러 개의 코너가 있는데 그야말로 적자생존, 강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적합한 게 오래 살아남는다. 제작진이 가장 힘 있다고 판단하는 코너가 맨 끝에 등장하는데 지난주엔 ‘뿜 엔터테인먼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상의 연예기획사인 ‘뿜 엔터테인먼트’에선 웃지 못할 풍경이 매일 벌어진다. 연예권력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최고 권력자는 바로 지금 ‘잘 팔리는’ 연예인들이다. 인기에 취하면 인격도 힘을 잃는가. “느낌 아니까” 하면서 대본을 제멋대로 수정하는가 하면, 그 곁에선 “잠시만요, 보라(지금의 스타)언니 목축이고 가실게요” 하며 기생·공생하는 무리들이 부화뇌동한다. 기획사 대표도 그들을 어쩌지 못한다. 아니 그냥 내버려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대표는 걱정이 없다. 인기가 없어지는 순간 버리면 되니까. 안 팔리는 물건은 즉시 교체하는 그 상점의 모토는 예나 지금이나 ‘감탄고토(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다. 그에겐 한때 보물단지였지만 지금은 애물단지가 된 왕년의 스타들이 가끔씩 찾아와 귀찮게 한다. 그들을 내쫓지 않고 그나마 달래주는 건 이 바닥에 남은 작은 의리랄까. 아니면 그들 나름의 정산절차일지 모른다.

 지금 최고령 MC이자 CF모델은 송해씨다. 강한 자가 아니라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걸 보여주는 실증 사례다. 그는 왜 여전히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까. 그의 이름(예명)에서 해답을 찾아본다. 해(海)는 바다. 말장난 같지만 갈채도 구박도 다 ‘받아’들이니까 ‘바다’다. 달콤한 것만 받아들이면 콜라나 사이다가 될 뿐이다. 환상도 궁상도 교훈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기도 인품 대열에 진입하는 듯하다.

주철환 JTBC 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