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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명절 스트레스 받는다는 33세 미혼 직장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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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33세 미혼 직장 여성입니다. 독신주의자는 아닌데 일을 하다 보니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빠도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고요. 그렇다 보니 명절은 부모님 잔소리 듣는 날입니다. 반복되는 잔소리지만 이상하게 설날보다 추석에 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게다가 높고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처집니다. 혹시 가을을 타는 걸까요.

A 가족은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공동체입니다. 누구보다 가깝기에 역설적으로 갈등도 많습니다. 게다가 남녀 차, 세대 차 등 갈등요소까지 내재돼 있습니다. 저마다 철학이 다 다른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철학을 가족에게 강요하다 보니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명절은 가족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힐링 타임이 될 것 같지만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움보다 상대에 대한 걱정, 즉 잔소리가 먼저 나오는 거죠. 잔소리엔 분명 애정이 담겨 있지만 불안도 들어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는 행복할 여유가 스며들기 어렵기에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설날보다 추석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요. 추측하신 대로 이건 가을이라는 계절적 요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을을 탄다’는 말은 가을이란 계절에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가을을 제대로 타면 감정 기복이 마치 롤러코스터 타는 것처럼 요동친다고 합니다. 높고 파란 하늘이 멋지다고 생각하다 갑자기 슬퍼지며 눈물이 핑 도는 식입니다. 가을은 이렇게 시적 감수성을 활성화합니다. 섬세한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가을을 타기 마련이고요. 이렇게 예민해지니 부모님 잔소리가 더 섭섭하게 여겨지는 겁니다.

 ‘여름을 탄다’거나 ‘겨울을 탄다’고는 안 하죠. 여름의 고온은 뇌에는 스트레스입니다. 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냉난방 장치 덕분에 한여름 열사병 사망자나 한겨울 동사자가 별로 없지만 여전히 우리 뇌는 여전히 여름과 겨울을 위기로 인식합니다. 생존과 관련한 전투 시스템이 강하게 작동하기에 시적 감수성은 둔해집니다.

 가을,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해진다고 꼭 불편하게 여길 것만은 아닙니다.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복감이란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성취에 비례해 커지지 않습니다. 만약 많이 가진 순서대로 행복감을 느낀다면 부자 순위가 곧 행복 순위가 되겠죠. 하지만 현실에선 ‘사회경제적 성공=행복’이란 공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했죠. 가을엔 누구나 내 삶을 조금 떨어져 관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아니, 인생의 본질적인 고독과 허무를 느끼다가 ‘인생 뭐 별거 있나’라는 가벼운 염세주의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긍정’을 강조하는 세상입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더 건강하고 결혼 잘 하고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즐비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자고 마음을 먹어 보지만 쉽지 않죠. 혼자 열심히 외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긍정적 사고라면 아마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가벼운 염세주의적 사고를 하면 오히려 긍정적 생각을 하는 데 효율적입니다.

 이처럼 가을을 타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을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고 겨울을 맞는 게 더 속상한 일입니다. 가을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며 성취한 내 인생을 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기간이니까요.

 추석(秋夕)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입니다. 가을 달빛이 좋은 밤, 달이 유난히 밝은 좋은 명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거죠. 수확의 계절에 내가 이룬 삶의 성과물에 감사하고, 꽉 찬 보름달을 바라보며 속상했던 일을 툭 던져버리고, 동그란 보름달이 초승달로 기우는 걸 떠올리며 염세주의 철학자처럼 삶의 상승과 소멸 곡선을 느껴보는 것, 이게 바로 추석 보름달이 주는 선물입니다. 꽉 찬 보름달이 나를 비추듯 나도 내 삶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비극 같던 과거도 희극 같은 현재로 바뀔 수 있습니다.

 가을은 이렇게 치열한 삶에서 잠시 거리두기 연습을 하며 과거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기 좋은 기회입니다. 과거가 실제로 행복했느냐보다 현재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현재와 미래의 행복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요즘 병영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그건 군대 시절이 행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괴로웠던 기억은 다 녹아버리고, 전우애 같은 촉촉하고 감성적인 기억만 다시 경험할 수 있기에 보는 겁니다. 이렇게 과거 행복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게 과거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이번 추석 명절은 온 가족이 모여 과거 행복했던 기억을 다시 경험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엄마와 가장 행복했던 일, 아내와 행복했던 연애 시절 등 행복했던 과거 일을 생각하고 공유하는 것. 유치해 보이지만 과거의 긍정적 재구성을 통해 현재의 행복감을 증폭시킵니다. 고향에 내려가셨다면 내게 행복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을 찾아가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과거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복이 진실이고 행복은 과거에 대한 내 긍정적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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