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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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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호 28면

이시구로 가즈오 (Ishiguro Kazuo, 1954~ ) 일본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다. 1989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남아있는 나날』이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복제인간의 슬픈 운명을 그린 『나를 보내지 마』를 비롯해 인간과 문명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슴 저미게 아플 때 위안이 되는 것은 누구의 조언도 위로도 아니다. 나와 똑같은 아픔을 가진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3>『남아있는 나날』과 이시구로 가즈오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오늘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들을 하지 못했다.”

영국의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 그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젊은 날 말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 그녀와 사소한 오해가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바로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켄턴 양과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있는 줄만 알았다.”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은 스티븐스가 생애 첫 여행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달링턴 홀의 전성기 시절, 그의 밑에서 일했던 켄턴 양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 여행을 떠난 계기가 됐다. 그가 보기에는 그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고 달링턴 홀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는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마침내 여행 마지막 날 이제는 벤 부인이 된 그녀를 만난다. 20년 만의 재회,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지 못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 옛날 달링턴 홀을 떠나올 때는 단지 그를 약 올리기 위한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는데,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고 딸이 커가자 어느 날 문득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물론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내가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는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말씀하신 대로 시간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이 작품은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데, 특히 이 장면에서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그의 표정과 슬픈 듯하면서도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가 애잔한 여운을 남긴다.)

달링턴 홀을 세상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스티븐스, 그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으며 자기 인생의 정당성을 찾는다. “진정으로 저명한 가문과의 연계야말로 위대함의 필요조건이다. 자신이 봉사해온 세월을 돌아보며, 나는 위대한 신사에게 내 재능을 바쳤노라고, 그래서 그 신사를 통해 인류에 봉사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위대한 집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일생에 딱 한 번 찾아온 사랑마저 포기한 채 오로지 헌신과 충직함으로 달링턴 경을 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으로 모셨던 주인은 선량하기만 했을 뿐 현실을 보는 눈이 어두워 히틀러에게 이용만 당하고 나치 협력자라는 불명예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달링턴 경에게 그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전부 다 주었는데, 이제 저택과 함께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새로운 미국인 주인에게 팔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는 벤 부인을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고 바닷가를 찾는다. 어둠이 내리고 선창에 불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는 그곳에서 자기처럼 집사로 일하다 3년 전에 퇴직한 노인을 만나 얘기한다.

“달링턴 나리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할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는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한다.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니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죽 뻗고 즐길 수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자기에게 부족한 농담을 배우는 데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새 주인나리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다. 안타까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젊은 날의 사랑도 가고, 맹목적인 믿음의 허망함도 깨달았건만, 아쉬운 미련이 또 그를 붙잡은 것이다. 아, 정말! 남아있는 시간은 많지 않은데.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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