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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의 '때깔' 바꾼 그녀 … "옷 맞출 땐 수다 떠는 옆집 아줌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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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국계 디자이너 수재나 정 포레스트가 만든 의상을 입은 힐러리 클린턴의 다채로운 모습. 무겁고 지루해 보이는 짙은 색 정장 일색이던 미국의 다른 여성 정치인들과 달리 힐러리 클린턴은 생동감 있는 색채와 여성적 선을 살린 패션을 선보이며 각종 패션잡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힐러리 룩’이란 말이 있다. 늘 흠잡을 구석 없이 완벽한 맞춤의 바지 정장을 입는 힐러리 클린턴(전 미국 국무장관)의 스타일을 일컫는 말이다. 언제나 무겁고 지루해 보이는 짙은 색 정장 일색이었던 미국 여성 정치인들의 패션과 다른 세계를 힐러리는 선보였다. 생동감 있는 색채와 여성적 선은 전 세계 신문 1면의 ‘때깔’을 바꾼 혁신으로도 일컬어진다.

 어느새 ‘힐러리 룩’은 성공한 여성, 글로벌 여성 리더의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영부인에서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거쳐 이제는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감으로 거론되는 그다. 힐러리 클린턴의 경력과 함께 ‘힐러리 룩’은 더 많은 이의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바로 그 ‘힐러리 룩’을 만든 사람이 한인 여성 수재나 정 포레스트(Susanna Chung Forest)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37년간 최고급 맞춤정장 부티크 ‘수재나 베벌리 힐스’를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얼핏 색다를 것 없는 평범한 정장처럼 보이지만 ‘수재나 베벌리힐스’의 옷은 한 벌당 4000~6000달러를 호가한다. 2007년부터 힐러리 클린턴의 의상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동안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대중이 접해 온 힐러리 클린턴은 십중팔구 ‘수재나 베벌리힐스’를 입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다. 선거 유세장, 각국 정상과의 만남 현장, 유력 일간지 인터뷰나 시사 주간지 표지 촬영 때도, 힐러리 클린턴을 빛낸 것은 수재나 정 포레스트의 옷이었다. 2009년과 2011년 방한 시 입었던 의상도 물론이다.

패션 디자이너 수재나 정 포레스트(사진 오른쪽)가 힐러리 클린턴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수재나 정은 2007년 7월부터 힐러리 클린턴의 의상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다. [사진 수재나 정 포레스트]

 수재나 정 포레스트 덕에 힐러리 클린턴은 ‘뉴스위크’나 ‘타임’뿐 아니라 ‘보그’나 ‘바자’ 같은 패션지에서도 러브콜을 보내는 인물이 됐다. 힐러리 클린턴이 ‘글로벌 리더’를 넘어 여성들의 ‘아이콘’이자 ‘패션 리더’의 지위까지 얻게 한 주인공, 수재나 정 포레스트를 베벌리힐스 부티크에서 만났다. 마침 그는 한창 힐러리 클린턴의 2013 가을 컬렉션을 작업 중이었다.

 -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69년 미국에 왔다. 어린 시절 구세군으로부터 받은 물품 안에 들어 있던 유럽 패션 잡지를 접하며 처음 디자이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70년대 초반까지는 정말 어려웠다. 집도 얻지 못해 차에서 쪽잠을 자면서도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패션 스쿨을 마쳤고, 76년 베벌리힐스에 자그마한 부티크를 오픈했다. 사고로 척추를 다쳐 1년간 부티크 문을 닫는 등 어려움도 많았지만 80년대에는 TV와 영화 의상 부문에 주력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화 ‘러브 보트’ ‘원초적 본능’ 등 120여 편의 작품에서 의상을 담당했고, 드라마 ‘문라이팅’을 통해 87년 에미상도 받았다. 90년대부터 최상류층 여성들을 위한 맞춤복 제작에 뛰어들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힐러리 클린턴,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가문의 여성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글로벌 패션 기업인 존스 그룹의 오너 부인 캐럴린 킴멜, 연수입 4500만 달러의 셀레브리티 판사 주디 셰인들린 등이 주 고객이다.”

 - 힐러리 클린턴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힐러리가 한창 미국 대선 민주당 경선 후보로 떠올랐던 상원의원 시절인 2007년 7월 11일 론 버클 집에서 열린 기금 마련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는데,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중에 인사를 나눌 때 ‘내일 개인적으로 만나 의상을 부탁하고 싶다’고 하더라. 다음날 그가 묵고 있는 베벌리힐스의 한 호텔로 찾아가면서부터 본격적 인연이 시작됐다. 그 이후로 7년째 힐러리 클린턴의 의상을 전담하고 있다.”

 - 워낙 바쁜 정치인과 디자이너라 서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2007~2008년에는 그가 LA에 방문할 때마다 짬을 내서 만났다. 가장 훌륭한 옷을 완성해 내기 위해 그가 어떤 매력을 지녔는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체형이나 눈빛은 어떤지 등 알아가야 할 게 많다. 늘 내가 아침 일찍 호텔로 방문했다. 새벽 5시에 전속 헤어 디자이너가 머리를 만져주고 나면 7시쯤 내가 방으로 들어가 커피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 수많은 대중이나 다수의 스태프에 둘러싸여 있는 분인데 운 좋게도 우리는 항상 서로의 비서만 데리고 넷이서만 만났다. 국무장관이 된 후에는 해외 순방이 많아 예전만큼 자주 보진 못했다. 그 와중에도 시시때때로 우정을 담은 감사 편지를 보내와 나를 감동시켰다. 3주 전에 LA 인근 유대계 고등학교에 초청돼 강연을 하러 왔다고 해서 잠깐 얼굴을 봤다.”

미국 베벌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매장 앞에 선 수재나 정 포레스트. [LA중앙일보=김상진 기자]

 - 가까이에서 지켜본 힐러리 클린턴은 어떤 성품의 사람인가.

 “대중 앞에 섰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연설할 때와 같은 강인하고 냉철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따뜻하고 겸손한데다 소탈하게 수다 떨기도 좋은 이웃집 친구 같은 사람이다. 볼 때마다 ‘우린 포옹해야죠’하면서 힘껏 안아준다. 맨발로 호텔 정원까지 나와 돌아다니는 경우도 많아 ‘양말 좀 신으라’고 말하곤 한다. 무엇보다 유머감각이 빼어나다. 함께 있으면 서로 깔깔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자녀들 얘길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보좌관들이 ‘다음 일정이 있다. 이만 떠나셔야 한다’고 재촉한 적도 많다. 가끔은 너무 빡빡한 일정에 피곤하고 힘들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럴 때면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말이나마 ‘스파를 해 봐라’ ‘휴가 좀 떠나라’고 격려해 주곤 한다.”

 - 디자이너의 눈으로 볼 때 힐러리 클린턴은 어떤가.

 “아주 아름다운 몸매다.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허리도 얇고 몸에 굴곡도 훌륭하다. 피부도 정말 좋고 눈동자 색깔이 참 아름답다. 다양한 색상의 옷도 아주 잘 소화한다. 특히 레드와 로열블루 색상, 마카 실크 소재 옷을 좋아한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캐멀 색상의 의상을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몇 번 시도해 보니 아주 멋지게 소화해 내 인상적이었다.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돌아온 후에는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섹시한 스타일을 시도 중이다.”

 - 패션에 대해 까다로운 편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전적으로 나를 믿고 신뢰해 준다. 가끔 아이디어가 있으면 나에게 의견을 물어오는 정도다. 엊그제도 e메일이 왔는데 새로운 디자인에 대해 ‘당신 식대로 하세요(Do it your way)’라고 했다. 나도 존중해야 할 영역은 철저히 지킨다. 헤어 스타일, 액세서리나 구두 등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 힐러리 클린턴이 당신의 옷을 각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구겨지거나 불편하지 않다는 점, 사진을 잘 받아 언론에 보도될 때 멋진 모습으로 나온다는 점, 여성스러움을 잘 드러내준다는 점 등을 얘기했었다. 한 번은 편지에 ‘당신의 노고와 프로페셔널리즘, 훌륭한 디자인은 늘 저를 편안하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기분 좋게 해줘요. 이 놀라운 여정에 한 부분이 되어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써준 적도 있다.”

 - ‘힐러리 컬렉션’을 만드는 과정을 소개해 달라.

 “공식 일정을 수시로 확인해 그가 방문하게 될 곳의 기후와 문화, 행사 분위기나 참석자 등을 내가 직접 분석하고 판단해 옷을 디자인한다. 힐러리의 체형 그대로 만든 마네킹으로 피팅(맞춤)을 하고 체형의 변화가 있다 싶으면 그에 따라 치수를 약간씩 조절한다. 완성된 의상은 ‘TV 토론’ ‘오하이오 유세’ ‘케냐 방문’ 등 각각 용도를 명기해 우편으로 보낸다. 당내 경선 캠페인 때나 해외 순방 일정이 잡혔을 때는 의상 디자인과 제작 일정도 아주 바쁘게 돌아간다. 급하게 의논할 내용이 있을 때는 서로 직접 e메일로 한다.”

 - 그동안 힐러리를 위해 디자인한 의상이 몇 벌이나 되나.

 “그건 절대 밝히지 않을 나만의 ‘비밀’이다. 그게 가십거리가 돼 힐러리 클린턴의 명성에 책잡힐 일이 생기는 것은 내가 용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힐러리 클린턴 이름을 내걸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하는 것도 자제해 왔다. 그냥 힐러리가 지난 7년간 입은 옷의 ‘대부분’이 내 옷이라고까지만 말하겠다. 그가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는 4년 동안 세계 200여 개국에 ‘수재나 베벌리힐스’를 입고 방문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 그 많은 옷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디자인이 있다면.

 “200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입었던 탠저린 컬러 슈트다. 그 이벤트용으로 다섯 벌을 디자인했던 터라 어떤 옷을 입고 나올까 아주 궁금했는데 화사한 탠저린 슈트를 입고 단상으로 등장하는 순간 너무도 멋진 모습에 엄청난 짜릿함을 느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와’하는 탄성도 TV를 통해 들리는 것만 같았다.”

 - 한국에 첫 여성 대통령이 등장했다.

 “안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의 패션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아주 우아한 스타일이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한국에 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좀 더 서구적인 느낌과 여성성을 살린 디자인을 해드리고 싶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힐러리 룩’을 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해 보고 싶다. 힐러리 클린턴처럼 되고 싶은 젊은 여성을 위한 저가 라인을 출시할 계획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꼭 차기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 그러면 나 역시 미국 대통령의 의상을 전담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일 테니까. 한국에서 빈 손으로 이민 온 여자가 미국 대통령의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된다면 참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 같다.”

LA중앙일보=이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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