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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25 동란당시 주일대표부 참사관으로 있던「지미·김」(길준)은「딘」소장의 요망으로 미군 제24사단과 함께 대전전선으로 달려갔다가 부상을 당하고「딘」소장도 행방불명이 되어 사태는 매우 심각하였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군은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병원이 많이 소모된 데다가 유엔군도 아직 전부 도착하지 않아 단 한사람의 병력이라도 더 필요한 때이었으므로 재일교포 청년중에서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계획은 한국정부는 물론 유엔군사령부에서도 대찬성이었다.
그리하여 김용주 공사는 거류민단을 독려하여 교포사회에 널리 선전한 결과 약 8백명의 교포청년이 지원병에 응모하였다. 그리하여 조국의 환란을 구하고자 용약 제1선으로 달려갔는데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휴전 후에 판명된 바에 의하면 지원병의 전사자는 59명이요, 행방불명은 48명이며 귀 환자는 3백37명이었으나 일본정부가 재 입국을 허가하지 않아 본국에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이 2백16명이나 되었다.
그것은 지원병으로 일본을 출국할 때에 재 입국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의출국을 한 때문인데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워낙 총망중에 이루어진 일이므로 지원병을 한시라도 빨리 전선으로 데려가는 데만 급해서 그들의 처우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한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 재일교포 지원병들은 국군이나 유엔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행히 전사를 했거나 행방불명이 된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 보상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다행히 생명은 구조되었으나 일본정부의 거부로 가족이 있는 일본에 재 입국을 하지 못하고 본국에서 오도가도 못하게된 사람들의 형편은 더욱 딱하였다.
그리하여 동경에 있는 주일 대표부에는 그들 지원병의 가족들로 오랫동안 몹시 붐비었으며 전사자의 보상문제와 미 귀환자의 재 입국문제로 김 공사는 그가 공사를 사임할 때까지 비지땀을 흘렸던 것이다.
당시 한국전선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9·28 서울수복을 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는데 부산과 대구등지에 모여있던 수백만 피난민은 물론이요, 바다건너 멀리 본국을 바라다보는 재일교포들의 심정도 여간 암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라 일부 유력한 재일교포 사이에는 만일 부산이 함락되는 경우에는 제주도나 일본으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피난을 시키려고 비밀한 계획을 세웠으니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배를 확보해놓아야 되겠으므로 여러 군데 선박회사를 찾아다니며 배를 예약하는 교섭을 하였었다. 하루는 그런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영친왕을 방문하고 협력을 요청하였을 때 영친왕은 직업군인답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중부전선에서는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온「밴플리트」중장이 치열한 반격작전을 하는 모양이므로 모르면 몰라도 아마 바닷 속으로는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오. 그리고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사람들을 배로 피난시킨다는 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뿐더러 일본이 아무리 연합국의 점령 하에 있다고 하더라도 피난민을 일본으로 데려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지금 너무 성급하게 서두를 것이 아니라 좀더 전쟁의 추이를 관망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오.』
그리고 영친왕은 또 목전의 피난민 문제보다도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전화를 피해 공부를 하려고 일본에 밀항해왔다가 체포된 수많은 한국학생들을 석방시켜 하루바삐 학교에 입학시키는 일이 더 급하다고도 하였다.
영친왕의 말과 같이 한때는 제주도로 천도한다던 한국전쟁도「밴플리트」장군의 반격작전이 주효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부 재일교포들의 피난민을 위한 선박교섭 운동도 자연 소멸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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