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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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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15 해방이 되었을 때 영친왕은 누구보다도 아버님 고종황제를 생각하였었다.
큰 어머님 명성황후가 일본 장사패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한 이래 평생을 두고 일본을 원망하고 저주하시던 고종 황제, 소위 보호조약을 없애려고 해아 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다가 도리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고종황제―만일 황제가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38선이라는 「마의 선」이 생겨서 국토가 양단 된 것을 알게되자 영친왕은 군사전문가인 만큼 벌써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해방을 덮어놓고 구가할 수는 없었다.
38선은 그 옛날 일·로 전쟁 때 제정「러시아」측이 제의하여 38이북은 「러시아」가 관장하는 대신에 38이남은 일본에게 맡으라고 교섭한 일이 있었는데 결국 40여년 만에 그것이 실현된 것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일본 대신에 미국이 등장한 것인데 어쨌든 국토가 두 동강으로 나 나라의 허리가 가운데서 잘린 것만은 사실이니 이래 가지고야 어찌 국가의 안전이 보장되고 그 안에서 살고있는 백성이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영친왕은 아버님이 아직 살아계셨더라도 다만 일본의 패전을 기뻐하실 뿐, 마음은 역시 편안하지 못하셨으리라 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8·15해방이 되자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각각 점령하더니 그해겨울에는 소위「모스크바」외상회의에서 연합국인 영국과 미국과 소련의 세 나라가 『조선은 앞으로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결의를 하여 당시 국내 민중들은 연합국의 소위 「얄타」비밀협정으로 국토가 양단 된 것만도 분하거늘 거기다 또 신탁통치라니 웬 말이냐?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것은 일본 한나라를 쫓아낸 대신에 수많은 연합국의 지배를 받게된 셈이니 그야말로 앞문의 호랑이는 쫓았으나 뒷문으로 이리떼를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위한 해방이요 또 독립이란 말이냐?
소위 「신탁통치」문제는 민족진영의 총궐기와 미국 측의 반성으로 다행히 실시는 되지 않았으나 그때까지 민족진영과 함께 「신탁통치」를 맹렬히 반대하던 좌익진영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령으로 하룻밤사이에 갑자기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으로 표변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좌우충돌은 일층 격심하게 되었고 미 군정의 실패도 있고 해서 국내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혼란해갈 뿐이었다.
일본에 앉아서 멀리 조국을 바라보는 영친왕은 여러가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만일 이때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보호조약」이나 「한일합병」이 다만 일본 한나라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영·미·노 등 열강의 양해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8·15해방이나 신탁통치 문제도 역시 연합국의 힘의 정책으로 결정된 것임을 생각할 때 『아버님 고종황제가 살아 계셨대도 공연히 걱정만 더하셨을 뿐 아무 효과도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과 함께 『약소 국가의 운명이란 결국 이리치나 저리치나 매 일반이다』라는 생각을 깊이 하였던 것이다.
영친왕이 아버님을 회상할 때 잊혀지지 않는 여러 가지 장면이 있었으나 그중에도 11살 때 「이또오」(이등박문)에게 끌려 처음으로 일본에 갈 때와 그후 5년만에 어머님 엄비가 돌아가셔서 귀국했을 때의 일은 마치 어제일과 같이 항상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처음 일본으로 떠날 때에는 『일본으로 가거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되도록 내색하지를 말고 제왕이라는 것은 걱정은 남보다 자기가 먼저 하고, 낙은 남보다 나중에 하는 법이니라』고 타이르셨고 엄비 상사에 왔을 때에는
『너는 우리 음식으로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셔서
『국수장국에 편육을 얹어 겨울 배추김치로 먹는 것이옵니다』라고 말씀 여쭈었더니
『어허, 그것이 바로 한국의 맛이란다』라고 하시며 무릎을 치고 기뻐하시던 고종―영친왕은 해방의 기쁨과 혼란 속에서 그러한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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