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자 36년…「포르트갈」의 독재자「살라자르」의 생애와 일화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살라자르의 대립 세력 조종과 균형, 견제 책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곧 그의 정권 장수와 직결됐다. 살라자르 재정은 포르투갈 경제에 안정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안정은 유럽에서 제일 낮은 임금에다 가장 낮은 수준의 의식주에 허덕이고 가장 문맹률이 높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또 교회와 지주와 군벌을 잘 조종 한데서 가능한 안정이었다. 그 자신은 한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최고 권좌에 따를 법만 화려한 겉치장과 허례의 의식을 마다하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사생활은 검소하기 이를데 없었다. 또 후일의 안역을 위한 치부의 추문도 없었다. 바캉스도 자기 고향의 단층 소옥에서 보낼 만큼 사치를 모르고 유흥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1932년 7월5일, 이 가부장적 고집쟁이한테 대전의 날이 찾아왔다. 군정 대통령 카르모나 장군이 그를 수상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엄명한 각료 가운데 직업 정치인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았다. 법률가 1명, 거인 1명, 기술자 1명. 이렇게 순전한 전문가들만 끌어 들였다.
그가 물려받은 포르투갈은 오랜 세월에 걸친 실정의 산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중세적 봉건제의 잔재가 상존 하는 속에 노후한 행정이 저지른 국내 및 해외 식민지의 운영상은 가위 파국적인 상태였다.
『우리 나라의 흔한 돌을 수출 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부자가 되겠는데 하고 그가 탄식했듯이, 포르투갈은 풍부한 것이라곤 돌 (석) 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 여기에 그가 도입한 것이 바로 전형적인 「파시스트」 체제인 『신 국가 질서』와 조합 국가 체제란 것이었다.
수상이 된 후에 살라자르의 금욕과 내핍, 검소와 결백은 괴벽에 가까울 정도로 심해졌다. 수상이라고 하지만 그의 관저는 방 3개 밖에 없는 집이었고 식탁엔 노상 채소밖에 놓이는 게 없었다. 연료 값이나 하인들의 월급도 1백25 달러 밖에 안돼는 자기 주급에서 떼어 냈다. 해외 식민지를 가진 마지막 제국의 수상이 벽촌의 이름 없는 동서기와 같은 생활을 했다.
그의 인색과 대인 접촉 회피 벽은 전국민의 빈축을 살 정도 였다. 수상이 입는 일상복에는 호주머니를 아예 달지 못하게 했다.
누가 돈을 달랄 경우 호주머니 돈을 없애기 위해서였다는 것.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마마·보이」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다. 끝내 독신으로 마친 그는 여자와의 정사도 일생 동안 갖지 않았다.
그 대신 고아 2명을 양녀로 삼아 키웠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앓아 눕자 밤새도록 손수 간호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장가를 안가 길 잘했지…갔더라면 일생 이 노릇을 하기에 어디 나라 일을 돌볼 틈이 있었겠어?』 그러면서도 늘 몸서리 칠 고독에 고민했던 것 같다. 언젠가 그는 쓸쓸한 어조로 『나는 죄수나 다름없어. 마음을 국사에만 쏟고, 하려고만 든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사생활을 깡그리 희생했으니까…』하고 한탄했다고도 한다. 때로는 그의 고답적인 태도를 애써 변명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존경을 받기보다는 사랑을 받고 싶다』고. 한번은 어떤 촌락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고마워서 기념품을 증정하니까 살라자르는 일언지하에 이렇게 쏘아붙이더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을 도와주려고 다리를 놓았지, 아첨을 하려는게 아니다.』
1936년 「스페인」 서 「프랑코」장군 주도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각 2만명의 군대를 파견해 「파시스트」 동료를 도왔고 「마드리드」의 공화정을 저지하는 포르투갈 각 대학의 『적색 지식 분자』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이듬해엔 성당에서 미사 중에 폭탄 세례를 받고 간신히 살아났다. 노련한 살라자르도 프랑코처럼 2차 대전때 성급히 주체국에 가담하지 않았다. 1943년 히틀러의 패색이 짙어 지자 아조레즈 지역을 연합군의 해공군 기지로 선뜻 내 놓았다. 민주 진영에 대한 그의 제스처에 현혹된 포르투갈의 지식인들은 멋도 모르고 자유 선거 실시와 정치범 석방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살라자르는 일언 반사도 없이 그 서명자 명단을 비밀경찰 (PIDE)에 넘겼다. 따끔한 맛을 봐야 할 「적색 지식 분자」의 명단이라고 하면서.
『이 자리 (수상직)를 떠날 때 나는 포키트를 홀랑 뒤집어서 흔들어 보일 테다. 아무 것도, 먼지 한 오라기도 가지고 갈 생각이 없다』고 언젠가 그는 재임 중의 결백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와 민권을 송두리째 앗아간 살라자르의 40년 독재는 깊은 상혼을 남기기도 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