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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탐사

‘독사 선생님’ 많아지겠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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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중·고교 중에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교사가 한둘 없는 학교가 있을까 싶다. 나의 고교 시절에도 별명이 ‘독사’인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뺀질거리는 고3들도 벌벌 떠는 무서운 분이었다. 살모사보다 더 날카로운 눈을 한번 흘겨 뜨기만 하면, 그 눈초리에 꽂힌 학생은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와 마주친 마법사 꼴이 됐다. 부러진 아이스하키 스틱을 다듬어서 만든 ‘정신봉’을 늘 쥐고 다녔지만 거의 쓸 일도 없었다. 독사 눈을 부라리며 낮게 깐 목소리로 “이 짜~슥이…” 한 번만 내뱉으면 ‘상황 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분들은 대체로 체육이나 교련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난데없게도’ 국사를 가르치셨다. 난데없다고 한 데는 역사란 게 곧 옛날얘기인 만큼 구수하게 풀어놓는 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함의가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옛날얘기를 해주는데 있는 힘껏 인상을 쓰고 “똑바로 앉아 잘 들으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할아버지까지는 아니지만 지긋한 나이셨던 그분은 그렇게 하셨다. ‘강화도조약 1876년, 임오군란 1882년, 갑신정변 1884년, 갑오경장 1894년…’. 이렇게 칠판에 죽 적으시고는 예의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시험에 나온다. 외워라.” 그리고 우리는 외웠다. ‘강화도조약 1876년, 임오군란 1882년…’.

 아직도 그분의 말씀 중에 생각나는 게 있다. “나는 질문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분은 질문을 제일 싫어했고,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저 칠판에 적었고 학생들은 그저 그것을 공책에 받아썼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실력 없는 교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에 나올 것을 찍어줄 테니 닥치고 외우라는 ‘효율적인 교습방식’을 고집했을 뿐이다. 실제로 당시 예비고사 문제가 그렇게 나왔고, 그분이 찍어준 걸 충실하게 외운 학생이라면 누구나 만점을 맞을 수 있었다.

 고교 시절 국사 선생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한국사가 대입 필수과목이 된다는 소식을 접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게 그분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분 덕에 필수였던 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가 아주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세계사와 한국사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좀 더 뒤였고, 작게나마 역사의식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 것은 그러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이런 경험이 아니더라도 한국 학생들의 부족한 역사 인식을 ‘수능 필수’ 한 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교육당국을 이해하기 어렵다. 시험을 보면 공부를 할 테고 그러면 좀 덜 무식해지겠지 하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교육당국 내부의 반대 의견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렇다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고, 교육은 교육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골병이 들고 마는 것 아닌가.

 한국사 수능 필수 지정은 기성세대의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더욱 무디게 할 가능성이 크다. ‘갑신정변 1884년’은 아닐지라도, 학생들이 학원의 족집게 강사가 찍어주는 한국사의 편린들을 애써 외우게 될 테니 말이다. 그 편린들을 짜맞춰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건 강사들의 책임이 아니다. 시험문제가 그렇게까지 나올 순 없지 않겠나. 그 그림들을 맞춰 커다란 세계사 그림을 만드는 건 더더욱 아니다.

 벌써부터 학원가에선 한국사 강사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공무원 시험 준비학원의 한국사 강사들까지 몸값이 20~30%씩 뛰었다는 거다. 한국의 극성 학부모들이 국·영·수 만큼이나 중요하게 된 한국사 과목을 공교육에만 맡겨놓을 리 없다는 걸 발 빠른 학원들이 잘 아는 까닭이다.

 공교육이라고 다르지 않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성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학생들에게 역사의 맥락을 보여주고자 옛날 얘기를 풀어놓던 교사들조차 예상 문제의 모범답안을 가르치라는 강요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아하, 그러고 보니 알겠다. 고교 때 국사 선생님이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한가하게 시험에도 안 나오는 옛날얘기를 할 수는 없고, 외우라고만 시키면 학생들이 졸 테고…. 입시 변화로 학생들이 역사를 얼마나 더 잘 이해하게 될진 몰라도 분명한 건 하나 있겠다. 앞으로 학교에 ‘독사’ 한국사 선생님 많아지겠구나.

이훈범 중앙일보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