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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다리식 건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시민아파트의 구름다리에서 어린이가 떨어졌다. 높이는 7m. 머리를 다쳐 붕대를 감은 아기의 모습은 섬뜩하다.
TV「뉴스」에 비친 그 구름다리는 곡마단의 줄타기 무대 같다. 아슬아슬한 높이에, 폭마저 좁다. 두사람이 나란히 걸어가기에도 힘든다. 노인이 아니라도 현깃증이 날 지경이다. 그 다리엔 난간이 없다. 곡예사나 마음놓고 다닐지, 대중을 위한 시설은 아니다.
그 다리가 놓인지 3개월여만에 벌써 4명의 어린이가 떨어졌다. 늦은 밤에 취객이 넘어지지 않은 것이 요행이다. 그러나 언제 누가 또 떨어질지 모른다. 안전시설이 되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언제든지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이 다리에 매달린 주민은 1백50여명이라고 한다. 이들이 하루에 평균 다섯차례씩만 건너다닌다고 생각해도 7백50회이다.
그러나 주민들만 건너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위험은 더욱 커지면 커졌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똑같은 사고가 반복된 것에 문제가 있다. 그 위험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은 공중도덕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은 어리석은 일을 거듭할 때 누구나 얼굴을 붉힌다. 그것은 이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중을 위한 시설이 위험한데, 누군가는 그 안전대책을 서둘러야 했을 것이다. 서울시 당국도, 주민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파트라는 주거는 우리에게 아직도 낮선 생활양식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종속 가옥을 회피해왔으며 이처럼 군집생활을 한적이 일찌기 없었다. 그 때문에 서양의 민주주의는 생활양식에서 우러나온 필연의 생존조건이었다고 말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아파트생활의 기본조건은 공동의식에 있다. 모든 공적인 이익, 모든 공적인 불변의 서로 평균하게 나누어 갖지 않고는 군집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역시 이번의 구름다리만해도 그렇다. 주민들은 협심해서 그 대책을 강구했어야 옳다. 또한 서울시 당국도 마땅히 그들을 따뜻하게 도와야했을 것이다. 생존의 원초적인 여건을 무시한 생활터전의 제공은 선후가 뒤바뀌었다. 시민아파트뿐인가. 그 많은 지하도의 가파른 층계, 무너진 계단, 비좁은 길은 모두 그 「원초적인 여건」을 무시한 것이다.
인간 우선의 건설보다는 건설을 위한 건설, 실적만을 위한 건설 등은 결국 인간부재의 허구로 노출되고 말았다. 인산을 되찾는 명 행정의 명 시장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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