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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과 비애와 상식의 전시|김치수<문학 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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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인훈의 두만강>
최인훈씨의 『두만강』 (월간 중앙)은 우리 나라가 일제의 기반에 묶여있던 1943년, 국경의 끝 두만강 변의 소도시 H읍의 이야기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H읍의 모습이 다분히 이국적 느낌까지 주는 이 소설에서, 당시 한국 사회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인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두만강을 넘나들며 독립 운동을 하는 고진형, <이십 전후에 혁명가 아닌 사람 없고, 중년에 분별 있는 사회인 노년에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는 제재 공장 주인 현도영, 일본의 승리가 확실할 것으로 믿고 일본식 생활을 즐기는 한 의사, 침략자로서 그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다나까 헌병 대장, 그리고 이런 어른들의 밑에서 살고 있는 현경선·한성철·한동철 등은 이 소설의 풍속사적 일면을 보게 하며, 그들의 <살아감>은 두만강의 존재와 함께 서사시적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면에서라면 이 소설은 풍속과 인물의 주변 확대라는 과제를 갖고 있는 것이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지금까지 최인훈씨의 다른 작품 『광장』『회색인』『가면고』『구운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작품이 기여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씨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정치라든가 사회라든가 여자라든가 하는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통하여 자기 추구와 그것의 좌절과 그 시대의 근본적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이 주인공들이 자기 내면을 바라보게 된 것이 언제부터 연유하고 있는지 『두만강』은 보여주고 있다.
어린 동철은, 승전의 축제 속에 휩쓸리기도 하고, 「마리꼬」라는 개집아이와 <위험한 장난>도 하고 경선으로부터 <플란더즈의 개>이야기도 듣고 힘센 동급생 창호의 집요한 심술에 고통도 받는다. 여기에서 창호의 <힘>은 자기 밖으로 향하는 동철의 성격에, 「마리꼬」와 경선의 <섹스>는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동철의 성격에 콤플렉스를 형성하게 한다. 이 <힘>과 <섹스>에 대한 콤플렉스는 동철로 하여금 외부로 향한 의식의 문을 닫게 하고 자기 추구의 내면 응시에 집중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광장』의 이명준, 『회색인』의 독고준, 『가면고』와 『구운몽』의 독고민의 어린 시절을 이 작풍은 보여준다.

<이호철의 큰산>
이호철씨의 『큰산』(월간 문학)은 일상 생활의 비애를 <큰산>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으로 설명하고 있다. <큰산>이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이 들판에, 이 누리에, 쓸쓸한 느낌을 더하게 하는 것일까. 야산을 야산이도록, 강은 강이도록, 이만한 분수의 들판을 이만한 분수의 들판이도록, 저렇게 빠안히 건너다 보이는 우리 마을을 우리 마을이도록, 제분수대로 제자리에 쏘옥 들어앉게 하는 <큰산>의 의미는, 정신의 지주일수도 있고, 백치의 규범일수도 있고 문화의 전통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현실이 각박해지고 집에 던져진 고무신짝,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해지고, 그래서 고무신짝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순례를 하게된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생활하는데는 강해진 반면에 정신적으로는 나약해지고 있는 삶의 현실을 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점인 것 같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큰산>에 대한 회고로 그것의 극복이 가능할 수 있는 지하는 문제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큰산>에 대한 아쉬움으로 끝나고 있지만, 생활인들의 정신적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이 작가의 태도를 이 작품이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유재용의 환희>
유재용의 『환희』 (현대 문학)는 흔히 있는 대개의 상투적 에피소드로 엮어진 작품이다. 어린 시절, 매미 잡던 이야기와 정혼한 누님의 봉변과 친구 상철의 죽음과, 목사의 기적적인 삶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이야기 속에서 작가는, <공포>와 <환희>의 동시성 내지는 동질성을 발견함으로써, 삶의 고통과 생명의 환희를 <생명 전체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매미를 잡을 때 필요한 인내와 긴장감, 정혼한 몸으로 강간당한 뒤에 구장네 머슴 바우의 힘에 끌려간 누님의 공포와 쾌감, 수렁바위 절벽에 대해서 공포에 떨린 상철의 투신, 반동으로 끌려갈 때의 공포가 기쁨으로 바뀐 충격-이 모든 것이 예수의 수난 속에서 볼 수 있는 <환희를 품고 있는 위대한 공포>였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통한 삶의 인식일 수도 있고, 삶의 어려움을 통한 그것의 발견일 수도 있고, 유한성을 통한 무한성의 동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삶의 고통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에피소드의 상투성을 벗어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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