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해학 변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내가 보기에 한국의 해학은 예술의식에 의해 만들어졌다기 보다 직접 생활에서 우러나왔다는데에 그 특성이 있지않나 생각한다. 생활에서 직접 출발했기때문에 자연 추상하된 개념이 아니고 구체성을 띠고 있다. 그 예를 찾자면 지금으로부터 2백2, 3십년 전에 씌어진 박지원의 『양반전』 이란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많은 곡식을 주고 양반칭호를 사려는 한 서민이 등장한다.
양반칭호를 받는 식전에서 군수가 양반의 특전을 말하는 가운데 『양반이 되면 이웃집 소를 마음대로 끌어다가 자기 밭을 먼저 갈수도 있고 농민들을 잡아다가 공짜로 자기밭의 김을 맬수도 있다. 만약 이처사에 거역하는 자는 코에다 잿물을 붓고 수염을 뽑아내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자 그서민은 『에쿠 나를 도둑놈으루 만들작정이오?』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도망해 버리고만다.
이 작품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수많은 시대적 고난을 겪어오는 동안 한국민중의 정신생활에는 체념의 빛도 적지않으나 건강의 분량이 더 강하게 풍겨왔던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양상이 변한다. 일본의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도입된 서구작품의 「페시미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국현대문학의 색으로 자라게 됐던 것이다. 최근 그 방면에 대한 어떤 극복이 행해지고 있다고 봅니다마는 그래도 현대 한국소설서 발견되는 해학은 거의가 체념에 가까운 차원을 띠고있다. 그 예를 한국동란후에 등장한 작가중에서 하나 찾는다면 하근찬의『수난이대』를 들수 있을 것이다.
이작품은 표제가 말하고 있듯이 아버지와 아들 2대에걸친 수난을 그리고 있다. 한국동란때 일선에서 제대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기차 정거장까지 마중나갔던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잃고 돌아오는 아들을 보게된다. 아버지 자신은 일제시대 징용나갔다가 한쪽 팔을 잃어버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내를 건너게되어 아버지는 하나남은 자기 팔을돌려 아들을 업으면서 아들의 하나님은 다리를 꺽 안은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앉아서 할일은 네가하고 돌아다녀야할 일은 내가하지』하거 서글픈 여유를 보인다.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더욱 친근하게 느껴기는 이 일견 비참해보이는 해학은 그러나 아직 완전한 체념이라기 보다는 이를 극복해 나가려는 건강의 빛이 어딘가 숨쉬고 있는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높이 끌어올리느냐 하는 것은 한국문학 전체의 한숙제인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