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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당시 일본은 군벌의 전성시대로 육군대장 야마가다(산현유붕)는 소위 장주벌의 대표격으로 원로적 지위에 있었고 역시 육군대장 데라우찌(사내정의)는 조선총독으로 있다가 총리대신이 되어 그 두 사람이 일본의 궁중과 부중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친왕의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이 앞장서서 『영친왕비는 꼭 일본 황족이라야 된다』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나시모도노미야(이본궁수정왕)의 큰 딸 마사꼬(방자) 왕녀를 황태자비로 삼으려고 결정한 것이었다.
영친왕이 육군소위로 동경 고노에(근위) 연대에 근무할 때인데 하루는 일본인 사무관이 들어오더니
『전하, 이본궁가와의 약혼이 거의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사내·산현 두 원수가 대단히 노력해서 성상(일본 천황을 말함임)께서도 윤허를 하셨다고 합니다.』
영친왕은 다만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인데 그때 마침 고희경사무관이 들어왔다.
『다름이 아니오라 전하의 혼사에 대해서….』
『지금 막 들었소.』
『그러면 말씀여쭙겠읍니다만 이번 혼사는 군인들끼리 저희 마음대로 작정한 노릇인데 전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사실 영친왕은 일본 황족의 왕녀와 결혼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아닌지를 얼른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부왕폐하의 윤허가 있어야 될 일이 아니오. 만일 강경히 반대를 하신다면….』이라고 말을 하고서도 일본의 군벌들이 하는 일이므로 누가 반대를 한대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사무관은 다시
『예, 곧 서울에 다녀오겠읍니다만 한가지 걱정이….』
『응, 민규수 말이지.』
『네, 예전에 황태자비로 간택이 되었다는데.』
『그렇소. 간택이 된뒤에 나는 곧 일본으로 왔소.』
『그건 저도 잘 압니다만 우리 나라법에 황태자비로 간택이 된 것만으로도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지않으면 아니 되므로 그것이 걱정이 옵니다.』
그 말을 듣자 영친왕도 마음이 언짢아져서 한참 동안은 말도 하지 못하였다. 자기때문에 한 사람의 여성이 시집도 못가고 일생 동안을 소위 만년처녀로 지내야만 된다니 얼마나 가엾은 일이냐?
그런데 바로 그 무렵에 이본궁가에서도 방자왕녀의 혼사문제로 야단이 났었다.
이본궁 수정왕은 맏딸 방자왕녀가 황태자비(지금의 소화천황)의 후보에 오른 것을 매우 기뻐하여 다만 그것이 확정되는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궁중에서 곧 들어오라는 기별이 있어서 『아마 오늘은 정식 간택이 되나보다』고 황급히 참내하여보니 천황은 뜻밖에도 방자왕녀를 황태자비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선 황태자 영친왕에게 시집보내라』는 것이었고 마침 참내해 있던 사내 총리대신도 『일본의 장래를 위해서 두 나라의 황실을 굳게 결합시킬 필요가 있으므로 모든 것을 참고 방자왕녀를 조선 왕실로 출가시키라』고 졸라대었다.
그래서 이본궁가는 마치 초상난 집과 같이 수심이 가득하였으나 결국 영친왕은 일본 왕족 못지않게 영특하다는 것과 천황의 명령은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였고 고종황제도 이 문제때문에 애를 태우시고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영친왕과 방자왕녀와의 결혼식은 1919년1월28일 동경에서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바로 그 일주일전인 22일밤에 갑자기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셨기때문에 결혼식은 무기연기가 되었다.
영친왕이 『태황제가 위독하시니 곧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은 것은 23일 아침인데 실상 서울에 도착해보니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신 것은 22일 밤으로 다만 영친왕이 도착할 때까지 발표를 하지않고 있음을 알았다. 열차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연도에서도 그랬지만 정작 서울에 도착해보니 대한문앞 넓은 광장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땅에 엎드려서 망곡을 하고있음이 처량하였다.
덕수궁안으로 들어서니 늙고 젊은 상궁들이 일제히 울음보를 터뜨리고 함령전에서는 창덕궁에서 달려오신 순종황제가 아버님의 영구앞에서 통곡하다가 영친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이번에는 형제분이 서로 얼싸안고 울었으며 그에따라 이백여명 상궁들의 통곡하는 소리도 더욱 높아졌다. 그것은 아마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슬픔에다가 나라가 망한 슬픔까지 겹친 때문이었으리라…. <계속>

<고침>
6월5일자(일부 지방은 6일자) 본고 기사중 전의 안고호라함은 안상호의 오식이기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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