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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아베의 역사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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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도발한다. 그의 정치 무기는 역사다. 아베는 전쟁기억을 재구성한다. 그것으로 대중영향력을 확장한다.

 도쿄 신주쿠의 이치가야(市ヶ谷) 기념관-. 아베 역사관의 뿌리가 드러나는 곳이다. 그곳은 일본군 대본영(大本營) 육군본부였다. 68년 전 패전 후 맥아더의 극동 군사재판 법정으로 바꿨다. 지금은 기념박물관이다.

 도조 히데키 등 전쟁 주범들은 거기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전시실에 재판 자료, 사진, 유물들은 드물다. 도쿄재판의 비디오 시청으로 때운다. 전쟁의 책임과 반성을 담아내는 전시물은 찾을 수 없다.

 강당 단상에 ‘玉座’(옥좌) 표지판이 있다. 제국시대 히로히토 일왕(일본에선 천황)이 앉았던 자리의 기념이다. 그 표지는 분위기를 압도한다. 군사법정의 패전과 사죄의 기억은 밀려난다. 황군(皇軍) 일본의 향수로 바뀐다. 전시 공간은 일본군 유물로 차버린다.

 그런 속에서 거의 유일한 재판 전시품이 있다. 인도 출신 판사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의 사진, 판결문이다. 팔은 전범 전원을 무죄 판시했다. 전범 재판관은 미국·영국 등 연합국 출신 12명이었다. 팔의 무죄론은 유일했다. 팔은 전범 재판을 “정의(正義)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패전국 범죄만을 다룬 승자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8월 아베는 인도를 방문했다. 첫 번 총리 때다. 그는 “기개 높은 용기를 보인 팔 판사는 많은 일본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연설했다. 아베는 팔의 자손을 찾아 콜카타까지 갔다. 그리고 팔 판사를 회고했다. 1966년 팔의 도쿄 방문 때다. 팔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어린이들에게 뒤틀린 죄의식을 심어줘선 안 된다”고 했다.

 ‘승자의 보복, 무죄론, 뒤틀린 죄의식’-. 팔의 논리는 교묘히 짜맞춰져 있다. 팔의 언어는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 알리바이다. 망각과 향수다. 망각은 ‘전범 국가’라는 죄의식을 털어버린다. 향수는 군사력 부활로 작동한다. 아베의 역사의식에 팔 판사가 존재한다.

 독일도 같은 경험을 했다. 뉘른베르크에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소가 남아 있다. 2010년 그 건물에 박물관이 들어섰다. 전시물은 나치 범죄의 청산과 응징, 자성과 교훈을 드러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일 나치 수용소를 찾았다. 메르켈의 사죄는 그 박물관의 전시 컨셉트와 일치한다. 나는 이치가야와 뉘른베르크 양쪽을 찾아가 비교했다. 기억의 두 장소는 대비된다. 양국 리더십의 역사관 차이를 극적으로 반영한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의 침체를 경험했다. 일본인 다수는 국력 재기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아베의 역사 무기는 그런 염원을 겨냥한다. 아베 총리의 역사관은 동북아의 불안요소다. 한·중 양국의 공동 대응전략도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과거 사례는 공동 대처의 적정선을 그어준다. 1995년 11월 청와대에서 당시 김영삼(YS)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이 만났다. 그 무렵 일본 각료의 과거사 망언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일본을 강력 규탄키로 했다. 정상 간 공동전선이 형성됐다. 회담 뒤 YS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장쩌민은 “일본의 소수 군국주의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원론적 언급이었다. 장쩌민의 발언 수위 조절은 공동 전선의 이탈이다. 2년 뒤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일본은 YS의 지원 요청을 가볍게 거부했다.

동북아 국가 사이엔 갈등과 공조가 미묘하게 혼재한다. 우리는 중국과도 동북공정의 역사 갈등이 있다. 중국의 해양 영토(이어도) 주장은 잠재해 있다.

 박근혜 정권 등장 후 동북아 협조의 틀은 변화했다. 한·미·중국의 신(新) 삼각공조가 두드러진다.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신공조의 성과는 뚜렷했다. 경제 제재와 김정은 정권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북핵 위협의 본질은 그대로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억제와 대응의 수단은 한·미 동맹이다. 한·미 동맹의 연장선은 일본과의 안보 협력이다. 중국의 대북 압박은 일률적이지 않다. 한·중 협조로의 과도한 이동은 한·미 동맹에 상처를 낸다.

 역사를 무기로 삼는 리더십은 까다롭다. 한국의 아베 정권을 다루는 방식은 치밀해야 한다. 그 출발은 정치·역사와 경제·문화의 분리다. 역사 문제에 단호하면서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경제와 문화엔 과다한 민족주의 주입은 금물이다.

박 대통령은 통일을 국정 어젠다(광복절 축사)로 내세웠다. 남북한 통일은 중국·일본의 협력과 동의가 필요하다. 독일의 사례는 학습과제다. 일본 문제의 해법은 전략적 상상력과 비전을 요구한다. 리더십의 통찰이 절실하다. 여기에 국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