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영친왕이 비록 이불속에서나마 목을 놓고 운 것은 그 전에도 한번 있었다. 그것은 1910년8월29일 한일합병이 된 날이다.
그날도 영친왕은 책상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었는데 시종무관 조동윤이가 신문호외를 가지고 들어왔다. 당황한 목소리로
『전하! 한일합병이 되었읍니다.』
『무어?』
『합병입니다.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되었읍니다.』
『그러면 일본의 속국이 되었단 말이오?』
『황송합니다.』
영친왕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을 아랫사람에게 보이지않으려고 애를 쓰건만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자꾸 넘쳐 흘렸다. 그리하여 눈물속에 어렴풋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슬퍼하시는 얼굴이 보이는 듯 싶었다.
『전하! 그만 진정하십시오.』 조동윤도 따라 울면서 『합병이 된대도 황실에는 아무 변동이 없고, 일본의 황족으로 그대로 예우를 받으신답니다. 그래서 태황제폐하는 이태왕으로, 신황제(순종)폐하는 이왕으로, 전하는 왕세자로 새로운 명칭이 결정되었읍니다.』라고 말하니 영친왕은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고 더 한층 흐느껴 울었다.
조동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무슨 위로나 하듯이
『그러하오나 전하께서는 그대로 일본에서 공부를 하시도록 되어있읍니다.』
라고 말하니 영친왕은 버럭 화를 내면서
『싫소, 나는 곧 귀국을 해야겠소. 일본에 온지도 벌써 3년이 되는데 왜 한번도 보내주지를 않는단 말이오.』
『황송하오나 지금은 합병으로 시국이 혼란하므로 귀국은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는 정말 인질이란 말이오.』
『그럴리야 없지요.』
『아니야, 허울좋은 인질로 잡혀온 것이야.』
영친왕은 조동윤을 내보낸 뒤 생후 처음으로 목을 놓고 울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영친왕은 꼭 세 번 몸부림쳐 운 일이 있는데 첫번은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없어진 때요, 두 째는 어머님 엄비가 돌아가신때요, 세번째는 부왕되시는 고종황제가 승하하실 때였다고 한다.
어쨋든 엄비가 돌아간 것을 기회 삼아서 영천왕은 꼭 5년만에 본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사내 총독은 전임자 이등이가 약속을 했건 말았건 영친왕을 귀국시키면 다시는 일본에 보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허락을 하지 않았으나 엄비가 세상을 떠나게되니 모자간의 정을 막을 수가 없어서 5년만에 비로소 귀국을 허락한 것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영친왕은 즉시 덕수궁으로 들어가서 석조전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종황제와 엄비가 계신 함령전은 바로 지척에 있건만 어머님이 열병(장티푸스)으로 돌아가셨다해서 온통 소독약을 뿌려 함령전에는 즉시 들어가지를 못하고 다만 석조전 난간에서 『아바마마, 어마마마, 지금 막 돌아왔읍니다』하고 마음속으로 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친왕은 돌아가신 어머님곁에는 가지못하더라도 살아가신 아버님께는 곧 가서 뵙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허락되지않았다. 그뿐 아니라 시종이 『태황제께서 세자를 보시려고 석조전으로 오신다』고 아뢰자 영친왕은 깜작놀라서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보러오신다니 그것은 인륜에 벗어나지 않으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시종은 『함령전은 위험합니다. 만일의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십니까』하고 굳이 말렸다.
그러나 영친왕은 비록 열병에 옮는 한이 있더라도 함령전으로 가고 싶었다. 바로 그때에 함령전에서는 고종황제께서 『태자가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이땐가 저땐가하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시종이와서 『황송하오나 석조전으로 나시옵소서』하고 허리를 굽히었다. 황제는 깜짝 놀라서 『그게 무슨 소리냐. 만고에 아비가 자식을 먼저 가보는 법이 어디있단 말이냐』고 역정을 내시었다.
그러나 『왕세자 신상에 만일의 일이 있으시면….』이라는 시종의 말음 들으시자 이번에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마음에서 『그러면 내가 가지』하시며 시종의 뒤를 따르신다.
고종황제가 석조전의 층계를 올라서서 막 대청에 들어서자 『아바마마!』소리와 함께 태자가 뛰어나왔다.
『오냐 아기야!』
고종황제는 두 팔을 벌려서 태자를 껴안고 어깨며 팔이며 마구 어루만지셨다. 그리하여 인자한 황제의 두 눈에는 왕비를 잃은 슬픔과 태자를 만난 기쁨의 눈물이 한데 어울려서 그칠 줄을 몰랐다.

<고침>
6월2일자(일부지방은 3일자)기사 중 아다찌의 내부대신은 내무대신의 잘못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