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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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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친왕은 생모인 엄 비보다도 적 어머님인 명성황후(소위 민비)를 더한층 가엾은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엄 비는 상궁으로 있다가 자기를 낳고 비로 올라선 분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파란이 없었지만 명성황후는 한 나라의 황후로서 끔찍하게도 일본 장사 패의 칼에 맞아 돌아간 만큼 항상 그 점을 불쌍히 여기었던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황과 청국(지금의 중국)의 서 태후는 세계의 여걸로 유명하거니와, 우리 한국의 명성황후도 그만 못지 않게 영특했다.
그렇건만 왜정 때 일제의 악선전으로 말미암아 일국의 황후를 다만 민비라고 부르고 민비는 세상에서도 가장 좋지 못한 황후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것은 명성황후가 총명해서 저희들의 말을 잘 듣지 않으므로 일제는 황후를 눈의 가시처럼 여겨서 극도로 미워했던 때문이니 그만큼 명성황후는 가장 똑똑하고 또 총명스러운 황후였던 것이다.
1864년 제26대 왕 철종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철종의 양어머니 조 대비는 중신들과 의논한 끝에 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입승 대통케 하였다.
고종이 즉 그 분인데 고종은 열두 살 때 운현궁에서 연(지연)을 날리고 있다가 끌려 들어가서 갑자기 임금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생부 대원군이 대리로 집정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 나라의 모든 정치는 임금이 계신 대궐보다도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하게되니 그때를 가리켜 대원군의 십년 세도라고 하는데 비극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대원군은 종친의 한사람으로 오랫동안 불우하게 지내왔던 만큼 아들을 임금이 되게 함으로써 모처럼 얻은 권력을 하루라도 더 오래 가지고 있으려고 장차 황후가 될 며느리를 고르는데도 세심한 주의를 하였었다. 그리하여 장래 외척에게 세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특히 잘 아는 이의 딸로 생존한 부원군(황후의 아버지)이 없는 집안에서 후보자를 구하게 되니 마침내 그에 뽑힌 이가 대원군 부인의 친정 일가로 아버지가 없는 명성황후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며느리가 장차 자기의 평생의 원수가 될 줄은 1세의 영걸로 자처하던 대원군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만일 명성황후가 대원군이 희망했듯이 평범한 보통 여성이었더라면 구한말의 역사는 전연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허수아비가 되기에는 너무나 총명하였으므로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필경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새로 임금이 된 고종이 너무 나이가 어려서 생가 아버지인 대원군이 정권을 대신 잡은 때문이요, 둘째는 명성황후가 시아버지로부터 정권을 도로 찾아서 남편인 고종으로 하여금 임금다운 임금이 되게 하려고 한 때문이니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항쟁은 하나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1882년, 소위 임오군란 후 청일 전쟁으로 노대국인 중국이 조그만 일본에 지고 마니 한국에 있어서의 청국의 세력은 갑자기 약화되었으며 그 대신, 신흥 일본의 세력이 조수같이 밀려들게 되었었다. 이 정세를 본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러시아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고, 러시아 공사 웨바 역시 한국의 실력자인 명성황후를 이용해서 러시아의 세력을 부식하려고 하였었다. 그 결과는 마침내 일본으로 하여금 명성황후의 암살을 결의케 하였으니 이것이 명성황후가 비명 횡사를 하게된 근본 원인인 것이다.
때는 1895년10월8일 밤이었다. 당시 공덕리에 은거중인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에는 훈련대 제2대장 우범선이 야간 연습을 한다고 군대를 거느리고 일본 낭인 아다찌와, 오까모도를 비롯한 1백여명의 장사 패를 거느리고 대원군을 보러왔다. 그리하여 소위 무정을 쇄신한다고 78세의 대원군을 사인교에 태워 가지고 군대가 호위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필경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끌어내서 머리채를 붙들고 일본 도로 목을 자른 후 석유를 뿌려서 불을 지르니 명성황후의 육체는 삽시간에 한줌의 재가되고 만 것이다. 한나라의 황후로는 너무나 비참한 최후였다.
이 사실은 또 일본의 한국 침략사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이고 또 가장 큰 죄악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성황후는 총명한 여성이었으나 시아버지 대원군과 세력 다툼을 하다가 필경엔 왜적에게 희생이 되었으니 황후도 또한 이 나라에 태어난 가엾은 여성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친왕도 적어도 그가 발병하기 전까지는 항상 그의 적 어머니에 대하여 동정의 눈물을 금하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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