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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기적 같은 존재 그 반짝이는 사랑 전상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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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소설가 조경란은 “2011년 다리를 다쳤던 경험을 하면서 개개인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존재의 신비를 소설에 담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기가 자신을 향한 내밀한 독백이라면 편지는 상대를 향한 속 깊은 고백이다. 조경란(44)의 단편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주인공 미호가 남편 진교와의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는 ‘시아버지 전상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확장된 가족관계죠. 어려운 관계이면서 덤덤한 사이기도 하고. 동성이 아닌 이성인 까닭에 긴장되지만 소통이 가능한 관계이기도 해요.”

 아들과 남편이라는 다리를 거친,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는 졸지에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해야 하는 어색하지만 애틋한 사이로 바뀐다. 진교의 자살 때문이다.

 시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주도 서귀포의 한 펜션에서 지내던 두 사람의 생활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미호에게 ‘서늘한 쇠붙이가 자신을 슥 절개하고 지나가버리는 것 같던’ 새벽녘의 기억이 생생하던 날, 진교는 문섬이 바라다보이는 검은여에서 바다에 몸을 던진다. “검은여는 수평으로 무한히 넓어 스며들고 싶게 하는 곳이에요. 그 순간이 평화로워 삶과 죽음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죠.”

 소설 속의 검은여는 매혹적이다. 빛의 포자가 사라진 뒤 바다와 한 몸이 되는 곳, 그곳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진교의 뒷모습. 그래서 소설은 서사보다 분위기가 압도한다는 느낌을 준다. 예심위원인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전체가 부분을 부정하고 부분이 전체를 부정하는 제유(提喩)적인 수준이 유연하게 흘러간다. 장식적인 디테일이 아닌 자연스러운 디테일을 통해 분출되는 감동이 있다”고 평했다.

 “소설에 큰 사건은 없어요. 담백하죠. 마치 표면은 잔잔한데 아침에 반짝거리며 일렁이는 바다 같다고나 할까. 작품을 쓸 때마다 소설의 방향을 써놓은 글귀가 있는데 이번에는 이랬어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을 또박또박 적어나갈 것’이라고.”

 그래서 남편을 떠나 보내고, 시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쓰는 미호의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하다. 징징거리거나 토로하지 않는다. 게다가 경어체로 전해지는 미호의 고백은 소설의 묘한 색채를 증폭시킨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소통을 깊은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경어체를 써야 했어요. 미호는 낯선 곳에서 온 사람이라 서툴게 다가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죠. 시아버지에게 진교가 어떤 사람인지를 전하기 위해서도 경어체가 필요했어요.”

 잘라보기 전에는 속모양을 짐작할 수 없는 연근처럼 사람의 본심도 껍데기를 열어보기 전에는 알기 힘든 것일까. 시아버지와 아들인 진교는 서로 말하지 못했던, 하지만 같은 비밀을 품고 있었다. 진교가 태어나자마자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버려졌고, 시아버지가 그 아기를 데려와 키웠다는 ‘출생의 비밀’이다.

 비밀을 안고 평생 불안한 눈으로 아들을 지켜봤던 아버지는 진교를 묻고 온 뒤 급성 심근경색 발작을 앓는다. 아들의 자살이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는 시아버지에게 미호는 ‘그렇게 자란 생명이 훗날 저 같은 사람에게 한 신비가 됐다’고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신문기사에서 검은 비닐에 담겨 버려진 아기 이야기를 봤어요.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생각하면서 누군가에게 신비한 힘이 되는, 생의 신비를 남겨준 존재로 그리고 싶었어요. 생의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경란=1969년 서울 출생. 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 소설집 『국자 이야기』 『일요일의 철학』 등. 장편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복어』 등.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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