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공기관장 너무 오래 비워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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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공기업 경영 공백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우리의 입장을 밝힌 게 5월 하순이었다. 그로부터 80여 일이 지났는데도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청와대와 행정부만 현 정부 사람들이고 공공기관들은 여전히 빈 자리거나 전 정부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출범한 지 반 년이 지난 박근혜정부인데 진실로 박근혜정부는 아닌 셈이다. 인사(人事)가 더뎌도 너무 더딘 탓이다.

 공공기관은 멀게는 대선을 앞둔 지난해 말부터, 가깝게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올스톱 상태였다. 주요 결정을 미루고 일상적 관리만 하는 수준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3월 초 국정철학과 전문성을 강조하며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한 바도 있다.

 그러나 막상 공공기관장으로 임명된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낙하산 인사를 근절하고 적격자를 기용하겠다는 ‘선의(善意)’ 때문에 지연됐다는데 그렇다고 인사 잡음(雜音)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금융계 첫 인사였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대선 공신(功臣)이었고 곧 이은 KB금융지주 회장과 농협금융지주 회장은 관료 출신이어서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청와대는 6월 초 인선을 중단하고 추천 통로와 직군별 후보군을 다양화하는 개선책을 마련했다. 이젠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인사위원장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교체되면서 다시 감감무소식이다.

 그 사이 ‘경영 공백’이 현실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에너지 공기업들이다. 국내 에너지 정책의 현장 총감독 격인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균섭 전 사장이 6월 물러난 뒤 지금까지 사장이 없다. 한국지역난방공사도 3개월째 사장 자리가 비어있고 서부발전과 남동발전도 사장 공모 절차가 지지부진하다. 오죽하면 “오늘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 돼도 책임질 기관장이 없다”는 하소연까지 나오겠는가. 태국 물 관리 사업의 최종 계약 체결이 늦춰지고 있는 가운데 수장(首長)이 없는 한국수자원공사는 또 어떤가.

 인선 과정이 길어지다 보니 파열음도 잇따르고 있다.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박근혜계 정치인이 내정됐다는 설이 나오면서 시끄러웠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최근엔 국토교통부 고위 관료가 코레일 사장 선임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민주당이 재공모를 요구하는 일까지 있었다. 나름 신경 써서 기용했다는 한국전력 부사장은 원전비리 연루자였다. 경쟁자들이 상대를 낙마시키기 위해 투서하는 등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래서야 설사 인선이 이뤄지더라도 조직이 안정되겠는가.

 신중하게 고르겠다는 의도는 올바르다.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이해한다. 그러나 시간을 너무 끌고 있다.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면 결국 공기업이 망가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아닌가.

 박 대통령에게 맡겨진 날은 1826일이다. 취임 첫 해의 하루는 마지막 해의 한 달을 능가할 힘이 실린다. 그 시기를 인선 지체로 허송하는 건 아닌가 안타깝다. 박 대통령은 이제라도 속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