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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고종의 만수무강 빌었던 세종로 비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된 고종의 만수무강을 비는 칭경기념비각은 세종로 동북쪽 한 귀퉁이에 쳐박혀 고증건물과 지하도입구 지붕틈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먼지 낀 비각 돌난간엔 길거리 도장포 주인이 등을 기대고 한가로이 낮잠을 자는가 하면 다른쪽 난간위엔 구두닦는 아이가 닦아놓은 구두를 나란히 늘어놓곤 있다.
칭경기념비각은 고종의 나이 51세로 60을 바라보고 왕위에 오른지 40년이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각-. 타의에 의해 황제가 되고, 왜적에 의해 황후를 잃는가 하면 아관으로 옮겨 다니는등 파란만장한 고종의 생애에 이 비각은 또 하나의 애수를 아로새겨주고 있는 것이다.
고종은 철종3년(서기 1852년)7월25일에 태어나 철종14년(서기 1863년)12월 철종의 승하와 함께 입승대통하였으므로 광무6년은 고종의 성수가 망육 어극40년이 되는 해였다.
고종의 이와 갈은 두가지 경사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준비는 광무5년부터 시작되었다. 황태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고종의 덕을 칭송하는 존호와 명성황후의 존호를 3차례에 걸쳐 청했다.
그리하여 광무 6년2월과 3월 고종황제의 존호는「통천강운조극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열」이라고 이미 되어 있는 것 위에 다시「외훈홍업계기선력」을 가상하였고 또다시「건행곤정영의홍휴」를 더 보탰다.
이와 함께 고종의 보령망륙 어극사십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예식도 광무 6년3월부터 준비하기 시작, 그해 9월17일(음)에 거행할 계획이었으나 질병이 유행하여 각국의 사신들이 먼데서 오기에 불안하다하여 다음해 4월4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천연두가 궁중에 번져 각국사신을 맞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가을로 연기되었다가 결국 예식은 거행되지 못해 기념비만 세우게 되었다.
칭경기념비의 건립년대에 대해서 비면에는「광무6년 임인구월 일 조야송축소건」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1902년으로 볼 수 있으나 대한계년사에는 「칠년구월이일 (구력칠월십일일) 「입비우황토현송제덕」이라고 적혀있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후 이 칭경기념비각은 왜정 때 일본인들이 비각 앞문인 만세문을 어느 일본인 정원으로 옮겨 보는 이의 허전한 감을 자아내게 했다.
정부는 환도한 후(54년) 6·25때 폭격으로 파손된 각의 일부를 보수하면서 잃어버린 만세문을 찾아 제자리에 도로 옮겨 옛모습으로 가다듬어 놓았다.
만세문이란 세글자는 영친왕이 6살때 쓴 것이다. 을사보호조약이 있기 3년전, 그리고 그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기 5년전 국운이 풍전등화 같을때 6살 영친왕으로 하여금 만세문을 쓰게 한 것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꺼지는 등불에 안타까운 기원을 올린 것이 아닐까?
뒤늦게 사적171호로 지정된 기념비각 경내에는 우리나라 도로의 기점이 되는 도로원표가 있다. 동북으로 청진(7백83㎞), 함흥(3백62㎞), 서쪽 신의주(5백5㎞), 평양(2백70㎞), 남으로 광주(3백52㎞), 부산(4백77㎞)등을 표식해 놓은 도로원표의 원위치는 지금 있는 자리가 아니다.
원표의 제자리는 지금 있는 곳 중심에서 남서 69도13분쪽으로 55m되는 세종로 복판이었다. 세종로 도로확장으로 이곳에 옮겨진 원표는 비각경내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는 셈이다. <김영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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