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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그곳] '은밀하게 …' 인천 열우물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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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원류환이 바보로 위장하고 먹고 자던 `석이슈퍼`는 촬영을 위해 지은 오픈 세트. 아쉽게도 철거됐다.

북한 최정예 스파이의 위장 신분이 무려 달동네 바보라니. 관객 700만 명 고지를 향해 순항 중인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원작 웹툰의 파격적인 설정을 고스란히 되살린다. 간첩치곤 너무 잘생긴 주인공 원류환(김수현)이 잠입한 달동네도 웹툰과 판박이다. 인천 부평구 십정동 열우물마을에서 주로 촬영됐다.

경인철도 백운역에서 동암역 사이 함봉산 중턱에 자리한 열우물마을은 부평구에서도 가장 후미진 동네다. 구한말 우물이 많아 열우물(十井, 십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만조 때면 골짜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한때 87만㎡에 달했던 염전은 그러나 69년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10여 년 전 담벼락에 곱게 그린 벽화들이 옛 염전마을의 역사를 소리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연탄가게를 만났다. 도시가스가 안 들어오는 집이 적지 않은 듯했다. 아니, 주인조차 잃은 빈집이 많았다. “(재개발이) 내년에 된다, 된다 한 게 벌써 15년째요.” 40년 가까이 마을에 살았다는 노인이 말했다. 오래된 흙집이 많아 장마 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넋두리가 이어졌다.

동암역을 나선 지 20분쯤 됐을까. 영화사에서 얻은 주소에 다다랐다. 십정동 209-24. 원류환이 조선노동당의 명령을 기다리며 거반 머슴살이를 하던 ‘석이슈퍼’의 자리다. 원류환이 동네 꼬맹이들에게 구박을 받던 놀이터도 바로 근처였다. 모두 촬영용으로 지은 오픈 세트여서 지난 1월 철거한 지 오래였다. 누군가 가꿔놓은 텃밭에 매미 울음소리만 무성했다.

“수현씨가 바보 분장을 해놔도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예쁘잖아요. 영화를 찍을 땐 여학생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시끄러웠어요. 20년 전 골목에 십정시장이 설 때만 했지요.” 십정1동 남인숙(61) 통장이 가만히 회상했다.

한낮의 달동네는 적막했다. 앞서 영화 ‘터치’를 십정동에서 촬영한 민병훈 감독도 “십정동은 낮에 특히 고요하다”고 했다. ‘터치’의 주인공들은 한여름 진창 마냥 이 달동네에서 밑바닥 삶을 허우적댔다.

마을 너머 함봉산 정상 어귀에 눈이 갔다. 십정동 산39, ‘문둥이 시인’ 한하운(1920~75)이 그 어디쯤에서 아까운 생을 거뒀었다. 한센 병으로 손가락을 잃으면서도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를 썼다고 했다. 이곳엔 왜 하나같이 서글픈 것들만 깃들까. 영화 초반부 산기슭을 따라 간첩 원류환이 초조한 추격전을 벌였던 낮은 옥상들이 썰물에 드러난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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