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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한국 호랑이는 왜 바보로 변신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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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그림 속 호랑이의 표정이 딱 이렇다. 싫은 소리를 하는 까치에게 귀찮다는 듯 눈을 한 번 부라리는 데도 혀로 제 코를 쓱 핥으며 눈치를 본다. 소나무 가지 위 까치는 당당하게 꼬리를 치켜세우고 있는 반면, 호랑이는 기죽은 듯 앞다리 사이로 꼬리를 말아넣었다.

 맹수 호랑이는 조선 그림에서 ‘호작도(虎鵲圖)’, 까치호랑이로 나타난다. 경주대 정병모(문화재학) 교수는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돌보는 그림인 명나라의 ‘유호도(乳虎圖)’ 혹은 ‘자모호도(子母虎圖)’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민간에서 까치호랑이로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한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길상(吉祥)의 상징, 호랑이는 액을 막아주는 벽사(<8F9F>邪)의 상징이다. 명나라 호랑이 그림에선 까치와 소나무가 단순한 배경에 그친 반면, 우리 민화에선 호랑이와 까치의 갈등 관계가 부각됐다. 호랑이는 권력을 내세워 폭정하는 지배층을, 까치는 힘없는 서민을 상징하게 됐다. 동물의 왕 호랑이를 우스꽝스러운 ‘바보 호랑이’로 만든 배경이다. 사팔뜨기 호랑이, 고양이 같은 호랑이, 담배 피우는 호랑이, 눈치 보는 호랑이 등 바보 호랑이에는 종류도 여러 가지다. 이렇게 해서 호작도엔 우리 식의 명랑한 평등의식이 담기게 됐다.

호작도(虎鵲圖), 조선 후기, 종이에 채색, 148×94㎝.

 저 얼빠진 호랑이 그림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길상(吉祥)-우리 채색화 걸작전’에서 볼 수 있다. 책거리·장생도·화조도·서수도·용호도·문자도 등 여러 주제의 민화와 자수 병풍 등 100여 점이 대거 출품됐다. 일찌감치 민화의 가치에 눈뜬 개인 소장가 8명이 비장(<7955>藏)해 온 그림들이 이 화랑 30주년을 맞아 공개됐다. 오늘날의 그래픽 디자인에 응용해도 좋겠다 싶을 만큼 세밀하고 사실적인 호피도, 옛사람들의 공간 감각에 놀랄 수밖에 없는 책거리 병풍, 거기에 복이 깃들길 바라며 그리고 걸었을 겸허한 소망들까지. 오늘날에도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민화의 매력이다.

 그런데 왜 ‘민화’가 아니라 ‘채색화’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가천대 윤범모(미술학) 교수는 “한국 회화사의 주류는 채색화다.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불화가 그랬다. 생산된 작품의 수와 규모로 보나, 소비 계층의 광역화와 인원으로 보나 수묵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채색화로서의 민화의 복권을 주장한다. 출품작들은 개인 소장품인지라 다음 달 1일 전시가 끝나면 뿔뿔이 제집으로 돌아간다. 1·2부에 걸친 두 달여간의 전시 반응이 좋아 일부 작품은 미국 각지의 미술관으로 순회 전시될 예정이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