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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민족의 얼이 담긴 사적 117호 광화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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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헐리고 상처받기 41년. 광화문은 중앙청 앞 정문에 복원되었다. 복원된 모습이 현대식 시멘트 구조물이긴 하지만 광화문의 복원은 한민족의 끈질긴 항쟁의 얼의 결실이다.
환도직후 고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제8군사령관 맥스웰·테일러 장군과 함께 남산에 올랐다. 폭격으로 부서진 서울거리를 내려다보던 이박사는 테일러 장군을 불렀다. 『이보라구, 테일러 장군. 저기 보이는 총독부건물(중앙청청사)을 헐어내구 그 자리에 광화문을 옮겨지어야겠네.』 광화문 없는 경복궁 특히 총독부 청사에 대한 이박사의 불만은 가득했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 이태조 4년(1395)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남문 혹은 오문으로 불리었으나 그후 세종 6년 집현전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지었다. 광화문은 아치식으로 된 궐문이 단단하게 견실한 품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조 2층 다락의 화려한 모습이 서로 어울려 이씨 조선건축물 중 특유한 가치를 지녀 사적 제117호로 지정돼있다.
이태조 때 광화문이 처음 세워질 무렵엔 밑 축대는 화강암이었고 높이는 궁성과 같았다. 가운데 큰 홍예문은 임금의 전용출입문이었고 옆에 있는 2개의 작은 홍예문은 신하들의 출입문으로 구분되어 이왕조 대궁궐의 정문으로 위엄 있게 출발했다.
그러나 선조4년(1592) 전국이 왜적의 발굽아래 유린되는 임진왜란이 들어 닥치자 광화문은 경복궁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 이후 제 모습을 찾는데 2백73년을 기다려야 했다.
폐허된 경복궁과 같이 잡초 속에 버려졌던 광화문을 복원한 것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왕조위엄회복의 끈질긴 집념을 가졌던 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하자 경복궁복원에 착수했고 이에 따라 광화문도 고종2년(1865) 실로 2세기반이 흐른 다음 곤욕을 씻고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국운이 기울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망하자 광화문은 민족 얼을 상징, 고되고 성스러운 길을 걸어야했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일본을 상징하는 일자로 짓기로 한 일본은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했다.
흥분을 참지 못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반대가 빗발쳤고 흰 두루마기와 갓을 쓴 시골 선비들의 모습이 광화문 앞에 끊이지 않았다.
일본의 유명한 종교·철학·미학의 권위자 유종열씨(야나기·소오에쓰·고인)는 『광화문은 건축학 상으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조선의 대표적 건물이다.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광화문을 헐다니 될 말인가. 큰 잘못이다』라는 글을 잡지 개조에 실어 일본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철면피한 일본도 여론의 힘에 못 이겨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1927년 광화문을 헐어 눈에 잘 띄지 않는 동쪽 건춘문 옆으로 옮겼다.
광화문이 옮겨질 때 항간에는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이 헐리는구나』라는 비분조의 민족시가 나와 울분을 달랬고, 설의식씨가 쓴 헐려 짓는 광화문이란 글은 한때(1955년)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후손들에게 당시의 원통한 심정을 되새겨 주기도 했다.
6·25동란이 터지자 광화문은 또 한번 시련을 당했다. 포탄을 맞은 광화문은 다락을 잃고 석재부도 쪽이 나고 말았다.
광화문은 지난 68년12월11일 41년만에 제자리인 중앙청 정문에 복원되었다. 모습은 옛 모습이로되 2층 다락은 목재대신 단단한 시멘트로 변했고 박대통령의 친필 한글현판 광화문이 걸렸다.
관악산의 화기를 꺾는다는 두 마리의 돌 해태(중앙청 앞에 있음)와 함께 광화문은 항쟁의 얼답게 전 조선총독부의 화강암 건물 앞에 버티고서 있는 것이다. <김영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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