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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5년만에 본 월남(3)|이 규 현 <편집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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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월남의 동해안 「퀴논」 근방에 우리 국군의 주월 제100군수사령부가 있다. 이 기지 속 높다란 언덕 위에 국군이 세운 불광사라는 절이 있다. 우리 군승이 주둔하고있는 이 절에는 서울의 조계사에서 모셔간 부처님과 월남의 통일불교종단에서 기증한 부처님을 모셨다. 주월 국군의 전사자는 모두 이곳에 집중돼서 절차를 밟은 다음 본국에 송환되는 것이다.
마침 영령 33위를 안치하고 본국에 송환하는 봉송식을 하고 있어 필자는 화환을 증정하고 분향을 할 기회를 가졌다.

<철통같은 맹호중대기지>
단상에 흰 보자기에 싸인 유골함이 정렬되고 함 앞에는 전사자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체온을 느끼게 할만큼 씩씩한 청년의 얼굴들이었으며 더욱이 여러 사진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시울이 젖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월남의 멸공전선에서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을 바친 국군장병은 2천 6백명을 헤아린다.
파월 장병들은 수송선으로 고국을 떠난 다음 「퀴논」 「나트랑」 등 부대에 가까운 항구에 상륙하고 전투요원인 경우 육로로 중대기지까지 직행한다.
맹호부대의 한 중대기지를 방문했다.
양쪽에 높은 산을 바라보는 평지 「베트콩」의 통로로 생각되는 요소에 직경 약30m의 원형으로 만들어진 이 진지는 한국군이 창안한 구조로 돼 있다는 것이다.
출입문만 남기고 주위를 다섯겹의 철조망과 호로 둘러싸고 철조망 사이에 각종 폭발물을 장치하고 그 속의 외곽선에 개인용 엄호를 배치한 것이다.
내무반, 사무실, 지휘소 등은 모두 지하에 짓고 견고한 복개를 해 놓았다.

<모국 음반 보내달라 호소>
양쪽 산에서 「로키트」탄 같은 것으로 사격을 하더라도 끄떡없으며 만약에 포격을 해오면 즉각으로 보복공격을 하기 때문에 「베트콩」이 섣불리 공격을 해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이런 곳을 기지로 삼고 최소 1개 소대를 남기고 며칠씩 작전을 나가거나 야간에 매복을 하고 돌아온다. 그들은 대체로 이런 곳에서 1년간 싸우다가 다시 항구에 가서 수송선으로 귀국한다.
수도 「사이공」을 구경하는 것은 소수의 모범용사들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야간의 활동이 많기 때문에 병사들의 낙이란 낮에 내무반에서 단잠을 자는 것뿐이 아닐까 생각된다.
병사들의 한가지 즐거움은 군의 「라디오」를 듣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교들 말에 의하면 음악 「레코드」가 적고 너무 낡아서 병사들이 불평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전화로 곡목을 요청하는 「희망음악」의 「프로」가 있는데 『어느 가수의 어떤 노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더라도 그 「레코드」가 없기 때문에 청취자로 하여금 다만 『몇번의 음악을 부탁합니다』하고 요청케 한다는 것이다. 청취자는 어떤 음악이 나올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아무 번호나 부른다는 이야기다.
장병들은 본국에서 쓰던 것이라도 좋으니 「레코드」를 좀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아 호소한다.

<월남구경도 제대로 못해>
후진국에서 도시와 농촌은 판이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진다. 기왕에 한 외국에 다녀오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자기가 주둔하고 있던 중대기지 주변의 문물을 월남이라고 생각한다면 유감 된 일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외국 군인들이 휴전선 근방의 험한 산악 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경험으로써 한국을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월 한국군의 전과와 우수성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보도되어 여러 가지의 신화를 낳았다. 특히 얼마 전에 있었던 백마부대의 「독수리 백마 11호 작전」 은 『연합군 초유의 전과』를 올렸다고 사단의 장성들이 자랑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노획 한 무기 중에 소련제 1백 40mm 「로키트」 49문과 중공제 1백 7mm 「로키트」 12문이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의 적이 이와 같이 많은 「로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군의 상상 밖의 일이었다고 한다.
각종 무기·의약품·일용품·피복 등 노획품 중에 특히 흥미를 끈 것은 대학 「노트」에 정밀한 도해와 함께 깨알 글짜로 쓴 조산학 교과서였다.

<자재없어 재구촌 미완성>
한국군은 연합군 중에서도 대민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이름나 있다. 싸움 잘한다는 한국군이 월남서 철수한 다음에도 길이 남을 상징의 하나가 맹호부대의 재구촌이다.
「퀴논」 북쪽 30km쯤 거리에 있는 「푸카트」군 「캇한」면 「호아호이」 마을과 맹호부대 1연대의 재구대대가 자매결연을 한 것은 1966년 2월이었다. 이 지역의 「베트콩」을 소탕한 재구대대는 1백 80가구 8백 52명의 주민에게 주택과 식량을 마련해 주고 생에 대한 의욕을 고취했다. 이래서 군수의 상신에 의해서 이 마을을 재구촌이라 명명하고 월남정부의 정식 행정명칭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전화에 시달린 초가 마을에 깨끗하고 아담한 「콘크리트」 연립식 주택 24동을 지어 작년 여름에 제1차로 48가구를 입주시켰다. 국민학교와 태권도 도장도 지었다. 이 건물들의 소요자재는 7천 4백 80부대의 「시멘트」를 비롯해서 모두 한국의 민간 독지가들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런데 재구촌의 제2차 계획 25동과 제3차 계획 25동 및 돈사 2동은 주민들에게 공약한 사업인데 자재의 조달이 안 돼서 큰 일이라고 장병들이 걱정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업은 완성해야 주월군의 체면은 물론 나라의 위신이 서겠다고 안타까운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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