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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희생했는데 … 법정 싸움까지 해야 유공자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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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한 이모씨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씨는 전역 후에도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다 1972년 사망했다. 사망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안 유족들은 지난해 국가보훈처에 이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을 냈다. 이씨의 상이기장(전투 등 공무 수행 중 부상한 자에게 국방부 장관 명의로 주는 별 모양의 휘장) 수여번호와 병적기록표를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유족의 신청을 거부했다. 육군본부가 보내온 사실확인서에 이씨의 원상병명(공무상 발생한 구체적 상처 부위나 질병 명칭)이 공란으로 돼 있고 상처를 치료한 병상일지 기록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상이군인도 군에 부상 기록 없으면 퇴짜

 보훈처의 결정에 반발한 유족 측은 지난 4월 행정소송을 냈다. 이들은 육군본부 등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며 고인의 흔적 찾기 노력을 했다. 유족들은 최근 이씨의 소속 부대가 작전에 투입됐다는 기록과 병원 후송 이력 자료 등을 군에서 추가로 찾아내 재판부에 제출했다. 유족 측은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보훈처가 충분한 자료 확보 노력 없이 군의 통보 결과만으로 소극적으로 심사한 것은 우리 같은 사람을 두 번 울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강조되고 있지만 유공자 심사 시스템은 부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 탐사팀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김영주 의원과 함께 보훈처로부터 최근 3년(2010~2013년 3월 기준)간 국가유공자 관련 심사 및 소송 자료를 제출받아 분석한 결과다. 보훈처가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자 이에 불복해 행정심판·소송을 벌여 승소한 사례는 지난 3년 동안 518건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많은 참전 군인과 유족은 직접 입증자료를 찾아내 재판부에 제출해야 했다.

유족에만 입증 책임 … 신청자 절반이 좌절

 보훈처가 최근 3년 동안 내린 유공자 비해당 처분 결정은 2만6000여 건에 이르렀다. 이 중 절반을 넘는 1만3300여 건(51%)이 입증자료가 없다는 이유였다. 군에 충분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면 입증 책임은 유족 몫이다. 국가유공자 심사·등록 업무를 대행해 온 서울행정심판사무소 이종석 행정사는 “6·25 전쟁이나 베트남전은 병적기록표나 병상 자료가 보관돼 있지 않거나 훼손된 경우가 많다”며 “이런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개인에게 입증하라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자료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나마 있는 자료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참전 관련 기록의 보존·관리 체계도 부실하다는 것이다. 유공자 인정 문제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한 6·25 참전자 유족은 “군에 몇 차례 자료를 요청해 보니 처음에는 자료가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오는 자료가 매번 다르더라”며 “전문 인력이 없다 보니 주먹구구식으로 처리되는 것 같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각 군에서 회신 자료를 보내오면 국방부는 이를 취합해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라며 “국방부 차원의 별도 담당 부서나 인력은 없다”고 말했다. 각군별 유공자 업무 관련 담당자는 영관급 장교와 군무원 등 2~3명 수준이다. 민원 요청이 가장 많은 육군은 기록물 관리 전문가도 배치돼 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권기숙 한국보훈학회 부회장은 “국방부와 보훈처의 유기적 협조가 부족하다”며 “국방부 통보에만 의존해 심사하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보훈처 등의 전문인력이 직접 군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해 자료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력 부족, 관리 소홀 … 있는 자료도 못찾아

 유공자 심사 과정의 부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보훈처에는 연간 1만5000건 안팎의 유공자 심사 요청이 접수된다. 보훈처 각 담당 분과에서 2시간 동안 60~100여 건을 심사하다 보니 세밀한 검토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민원인은 “자료가 없다고 군이 통보하면 보훈처도 더는 살펴보지 않는다”며 “충실한 조사와 자료 확보가 될 수 있도록 보훈처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사전 검토를 거쳐 깊이 있게 토의해야 할 안건인지를 구분한 뒤 본심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이다.

김영주 의원은 “보훈처 처분 후 소송을 하지 않고 유공자 등록을 포기하는 민원인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국가의 참전기록 관리 부실과 소극적인 심사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6·25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 100만여 명 정도인데 현재까지 유공자로 등록된 이들은 6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탐사팀=고성표·이서준 기자

☞ 국가유공자= 국가를 위해 공적을 세웠거나 전투·작전 등 각종 공무를 수행하다 부상·순직한 사람.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본인에 대한 사망보상금, 간호수당, 부양가족수당, 생활조정수당 등 각종 금전적 지원과 함께 유가족(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취업 가산점, 의료비 감면, 교육비 지원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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