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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의 현대적 의미(1)인격-대표집필 윤태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때 - 3월 21일
곳 - 본사 회의실

<참석자>
사회 김 태 길 <서울대 교수·윤리학>
김 성 근 <서울대 사대학장 ·서양사>
김 태 관 <서강대 교수 ·신부>
최 재 희 <서울대 도서관장 ·윤리학>
윤 태 림 <연세대 교육대학원장 ·심리학>

<공동생활속 기본바탕>
인격이란 용어는 쓰는 사람에 따라 일정치 않다. 돈은 많은데 인격은 없다 할 때는 인품이란 뜻으로 교양이 부족하다는 말이 되고 도덕적인 우열을 따질 때는 가치판단의 의미로도 해석되고 또 넓은 의미에서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고 할 때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뜻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문제되는 국민적인 도의의 타락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인격이란 개념을 사회생활이란 테두리 안에서 고찰할 때에는 공동생활 속에서 최소한으로 갖추어져야할 기본적인 자격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다 더 깊이 이 문제를 파헤쳐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껴진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매일같이 당하는 것이지만 「택시」 하나를 잡는데도 소위 새치기하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근본사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원인부터 캐내어 보자.
이러한 경향은 해방 전 6·25 동란을 겪고 난 후부터 더 심해졌다. 해방 후 주로 미국을 비롯하여 들어 온 지나친 물자위주의 사상에다 전란에서 온 경제적인 파탄과 인명경시의 풍조가 충동적인 것을 억제하려고 하지 않고 그날 그날을 적당히 보내면 된다는 찰라 향락 사상과 더불어 남이야 어찌되었든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적인 사상이 팽창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문명의 인간소외>
또한 유교의 가르침은 도가 서면 나서고 도가 서지 않으면 물러난다는 극히 소극적인 태도가 적극적으로 악을 제거하겠다는 의욕보다는 선이 아니면 뒤로 물러선다는 경향이 강한 유교적 습성에서 탈피 못한 것이 또 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고, 근대화라는 과정은 자칫하면 인간소외, 인간부족, 인간의 도구화라는 결과를 가져와 물량, 기계를 앞세우고 인간의 존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향을 가져온 것이 또 하나의 원인이라고 지적된다.
예컨대 길을 걸어가더라도 자동차의 통행권이 보행하는 사람의 보행권 보다도 우선권을 인정하는 현 사회는 확실히 물질문명 ·기술문명이 인격을 도구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막스·웨버」의 인격의 공동체, 「이스라엘」의 「마르틴·부버」가 말한 인격의 폐쇄성과 개방성의 두 면이 인정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인격이란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도리어 조롱 거리가 될 만큼, 인격운운을 비웃는 시대이다. 자녀를 결혼시키는데도 부모는 당사자의 인격 여부보다는 재산, 학벌 등을 문제삼고 취직도 그렇고, 인격이란 가치가 중시되지 않는 세태이다. 본인의 능력이나 기품보다도 외적인 것을 추구하는 봉건적인 구습이 남아 있는 한, 일반의 사고방식 자체에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인격이 있다 없다는 근본에 있어서 개인각자가 자아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있어야 그것이 밑바탕이 되는데 우리나라서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혼동하고 있다.
「인디비듀얼리즘」은 「에고이즘」과는 별개이다. 개인의 자각이 앞선 후에야 자아가 발전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근대화, 근대화하고 부르짖지만 근대화는 도리어 인간의 도의를 말살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금력, 권력 앞에는 인격도 무력화되고 돈과 권세는 어느 의미에서는 횡포를 자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 해 갈수록 이에 반비례하여 도의는 타락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남을 위하다가는 내가 못살게 되기 때문이니 근본문제는 사회환경, 생활이 안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고, 오로지 나 이외의 남이 져야 한다는 생각은 용인되지 않는다. 너와 나의 공동체가 져야 할 것이며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개인주의 신장>
그렇다면 인간도의의 밑바닥인 인격을 도야하는데 에는 어떤 방안이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신장시킴으로써 자아의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타인이 가지고 있는 자아를 존중시킴으로써 인격을 형성시키는 길과 집단주의적인 사고이지만 민족적인 기풍을 진작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인가는 생각해야 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는 의문점이 많다고 본다. 전에 독일에 유학간 일본 유학생이 먹다 남은 「소시지」를 버리는 걸 늘 하숙집 주인이 나무라면서 그런 것은 동시에 국가의 손실이라고 꾸짖었다는 예가 있듯이 개인의식이 뚜렷하면 그것은 자연히 국가적인 의식으로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일제 때의 교육은 나를 희생시키고 국가를 앞세우는 교육이었다. 그러나 개인을 전연 무시하고 국가가 잘 될 수는 없지 않는가. 너무 민족의식을 강조하면 일제 때 억눌려 살아왔던 노인층의 사고방식이라고 젊은층은 비웃으며 도리어 오해를 사게 된다. 민족이 우선되어야 하느냐는 문제는 결국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 다시 말하면 휴머니즘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귀착될 수 있다.
「프롬」이 지적한대로 현대사회는 대차대조표의 논리가 인간성의 세계를 덮어 누르고 휩쓸고 있는 시대이다.
모든 것이 이해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성이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 생명의 존중이 보다 더 강조되어야 한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만 보더라도 우리의 현실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생명이 경시 당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있어서는 「휴머니즘」도 맥을 못 춘다. 징비록(징비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애비가 자식의 살을, 자식이 애비의 살을 베어먹은 예가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막다른 골목에 가서는 「휴머니즘」도 회의적이라고 본다.
이것은 이기주의의 「패러독스」라고 볼 수 있지만 자신을 위하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해치는 모순을 가져왔다.

<사제간 윤리관 확립도>
그러면 인격을 앙양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의의 기본은 인권에 있다고 본다. 인권은 다시 말하면 생존의 권리이다. 인간이 정당하게 자신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생존의 위험이 없어져야 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남을 존중할 줄 알고 인격이 향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살기 위하여는 즉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기 위하여는 생활의 위협이 없어야 하고 국민의 경제생활이 최소한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본다. 또 한편으로는 교육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의 교육은 남을 해쳐서라도 자기만을 앞장세우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경쟁의식을 너무나 조장한다. 「콩쿠르」다, 무엇이다 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불필요한 경쟁의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쓰러뜨리려는 의식은 자기만을 위하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의식과 더불어 자기 이외의 것을 부정하는 의식을 가져온다. 인간과 인간과의 접촉, 교수와 학생과의 대화, 직업이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접촉하는 사이에 인격은 형성되는 것이다. 선생과 학생과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생 자신이 인격자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도의를 가르치는 선생마저 학생들에게서 빈축을 사는 행동을 하게되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남을 가르칠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선생이 되어 그저 월급이나 받아먹겠다는 정도의 인물이 많기 때문에 학생들이 선생을 존경하기커녕 도리어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건전한 tv프로 기대>
또 한편 「매스·미디어」의 힘이 큰 것은 학교에서 선생이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것 보다도 매일같이 보고 듣고 하는 「매스 ·미디어」, 특히 신문이나 「라디오」 보다도 TV 같은 것은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스크린」에 나오는 사람을 죽이고 하는 살벌한 장면에서부터 지나치게 성을 강조하는 것 등은 건전한 가정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부모가 어린 자녀들과 같이 볼 수 없는 것 등을 볼 때 제작자나 연출가나 방송 당국자들이 좀더 국민적인 윤리에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고려해 주기 바란다.
물론 이 방면에는 방송 당국자들이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나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볼 때 유감스러운 점이 많다.
도의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 만큼 되도록 이면 도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서 무의식적으로 정화해 나가는 방향이 좋겠다.
대만에서는 「가톨릭」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데 일체 도의니 하는 말을 쓰지 않고 청취자들로 하여금 생각을 바로 갖도록 유도하고 있어 이러한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가정과 아동을 위하여 특별한 「프로」를 작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같은 시간에 3개의 방송국이 공동으로 이런 「프로」를 작성한다면 보다 더 재미있는 쪽으로 「채늘」을 돌리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하여간 앞으로는 「매스·미디어」 쪽에서 이런 면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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